역사와 계급의식 2장 해제
마르크스주의를 부르주아 과학과 결정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역사의 설명에서 경제적 동인(動因)에 우위를 둔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총체성(Totalität)의 관점을 취한다는 점이다. 총체성이라는 범주, 즉 부분들에 대한 전체의 전면적이고도 결정적인 지배는 마르크스가 헤겔로부터 물려받아 완전히 새로운 과학(Wissenschaft)의 토대로 독창적으로 변형했던 그 방법의 본질이다. 생산자가 생산의 전 과정으로부터 자본주의적으로 분리되는 것,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특성을 무시한 채 노동 과정이 세분화되는 것, 무계획적이고 분산된 채 단순히 생산만을 계속하는 개인들로 사회가 원자화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의 사상, 학문 및 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프롤레타리아 과학이 갖는 근본적인 혁명성은 그것이 혁명적인 내용을 가지고 부르주아 사회에 대립한다는 데 있지 않고, 무엇보다도 방법 자체가 가지는 혁명적 본질에 있다. 총체성이라는 범주의 지배야말로 과학에서 혁명적 원리의 담지자다.
대상의 총체성은 오직 [대상을] 정립하는 주체 자체가 하나의 총체성일 때에만, 따라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총체성으로서 사유할 수밖에 없을 때에만 비로소 정립될 수 있다. 근대 사회에서는 유일하게 계급만이 이러한 주체로서의 총체성이라는 관점을 대변한다. 마르크스는 특히 ≪자본론≫에서 모든 문제를 이러한 관점에서 다룸으로써, 여전히 ‘위대한 개인’과 추상적인 민족정신(Volksgeist) 사이에서 관점의 동요를 보였던 헤겔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이러한 바로잡음은, 비록 마르크스의 계승자들에게는 ‘관념론’이냐 ‘유물론’이냐 하는 문제보다는 훨씬 덜 이해되었지만, 그러한 문제보다도 한층 더 결정적이고 결실 있는 것이었다.
고전경제학, 더구나 그 속류 학자들(Vulgarisatoren)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항상 개별 자본가의 관점에서 고찰해 왔으며 바로 이와 같은 관점으로 인해서 일련의 해결 불가능한 모순과 사이비 문제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바로 이러한 방법과 근본적으로 결별한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선동적으로−모든 계기를 즉시 그리고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서만 고찰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일면적인 접근 방식에서는 말하자면 부호만을 뒤바꿔 놓은 또 하나의 새로운 속류 경제학(Vulgärökonomie)이 생겨날 수 있을 뿐이리라. 오히려 마르크스는 전체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계급들의 문제로, 즉 전체(Gesamtheiten)로서의 자본가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문제로 고찰함으로써 그런 방법과 결별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방법의 출발점이자 목표이고, 또 그 전제이자 요구인 총체성의 관점이 버려지는 순간, 혁명이 과정의 계기로서 파악되지 않고 발전 전체로부터 분리된 고립된 행위로서 파악되는 순간, 마르크스의 혁명적인 면모는 노동운동의 원시적 시기로의, 블랑키주의로의 후퇴로 여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전체적인 발전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총체성으로 파악하여 제국주의의 현상을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개별화된 계기들에 대한 개별 과학적인 연구에 스스로를 한정함으로서 이와 같은 대결을 회피할 것인가를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개별 분과적(monographisch) 관점은 기회주의적으로 변신한 사회민주당 전체가 보기를 두려워했던 문제에 대해 시야를 가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사회민주당은 개별화된 영역들에 대한 ‘엄밀한’ 기술(記述)과 개별 사례들에 관한 ‘초시간적으로 타당한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제국주의와 이에 선행하는 시대와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 ‘일반’ 속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존속은, 그들[사회민주당]에게는 리카도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부르주아적인 속류 경제학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점점 더 인간 이성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으로, 정확히 ‘자연법칙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부합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찾기 위해서는, 스미스와 리카도가 발견한 ‘자연법칙’을 사회 현실과 동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전 세계의 제국주의적 착취에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운명인 세계대전을 어떻게든 모면해 보려고 노력하던 소부르주아적으로 된 노동귀족층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는, 마치 자본주의적 축적이 수학적 공식들이라는 저 진공의 공간 속에서 (따라서 아무런 문제도, 세계대전도 없이) 수행될 수 있는 듯이 [사회의] 발전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리카도적인 ‘자연법칙’을 사회 현실과 동일시하는 것이 발흥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자기방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학파의 마르크스 해석, 특히 마르크스적인 추상(抽象)을 사회의 총체성과 동일시하는 해석은 몰락기 자본주의의 ‘합리성’의 자기방어였다. 그리고 청년 마르크스의 총체성에 대한 고찰이 당시 아직도 꽃피고 있던 자본주의의 병적 징후를 환히 비추었던 것처럼 자본주의의 근본 문제들을 역사 과정의 총체성 속에 끼워 넣어 고찰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고찰 속에서 자본주의의 마지막 개화는 무시무시한 죽음의 춤이라는 성격,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향해 오이디푸스가 걸었던 길이라는 성격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총체성의 고찰이 파괴되면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행위와 실천−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무엇보다 첨예하게 요청했던−은 그 본질상 현실에의 침투이며 현실의 변혁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직 총체성으로서만 파악되고 침투될 수 있으며, 그 자신 총체성인 주체만이 이와 같이 현실에 침투할 수 있다.
오직 계급만이 행위에 의하여 사회적 현실에 침투할 수 있으며, 사회적 현실을 총체적으로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계급의 관점에서 가해지는 ‘비판’은 그것이 총체성의 고찰임으로 해서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이론과 실천은 분리할 수 없는 변증법적 통일 속에서, 역사적 · 변증법적 과정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고 그 반영인 동시에 동인(動因)이다. 사회의 사유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순수한 법칙의 숙명론과 순수한 심성(心性, Gesinnung)의 윤리학 사이의 무기력한 딜레마를 일격에 쳐부순다.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이론 속에(in) 존재할 뿐만 아니라 실천에 대해서도(für) 존재한다.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과 행위 속에서만 그들의 계급의식을 획득하고 고수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부여된 역사적 과제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과 개별 투쟁가도 이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자기들의 실천 속에 끌어들일 수 있어야만 비로소 자신들의 이론을 실제로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죄르지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2장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로자 룩셈부르크>
이론과 실천의 통일, 그리고 계급적 변혁의 주체
-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본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
《역사와 계급의식》은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가 남긴 20세기 최고의 책 중 한 권이다.
특히, 2장 '마르크스주의로서 로자 룩셈부르크' 부분은 계급의 역할,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관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 등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전개한다. 루카치는 이 장을 통해 계급적 관점에서의 비판이 사회적 현실에 어떻게 침투하고, 궁극적으로 변혁의 동력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강조한다. 본고에서는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유 주체로서의 역할,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계급적 실천의 형태를 중심으로 루카치의 논의를 요약한다
계급과 사회적 현실의 변혁
루카치는 "오직 계급만이 사회적 현실에 침투하고 이를 총체적으로 변혁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계급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의 핵심을 드러낸다. 특히 그는 사회를 변혁하는 주체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설정하면서, 계급적 관점이 단순히 구조적 결함을 폭로하는 비판적 도구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재편할 수 있는 열쇠임을 역설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인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일구어낼 능동적 주체로서 존재한다. 계급이라는 개념은 단지 이론 속에 머무는 분석의 틀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를 통해 사회적 현실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힘이다. 따라서 계급은 억압받는 위치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모든 사회적 관계에 개입하고 변혁의 주체로 재탄생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
루카치 사상의 핵심은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관계를 밝히는 데 있다. 그는 이론과 실천이 단순히 독립된 개별 활동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변혁하고 완성해 가는 관계라고 강조한다. 이론은 실천 속에서 검증되고 활력을 얻으며, 실천은 이론을 통해 방향과 목적을 갖추게 된다. 이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는 루카치 철학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특히, 그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변증법적 과정으로 바라본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이론과 실천은 역사적 원인이자 결과로 상호작용하며, 사회적 구조와 인간 행동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예를 들어,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라는 실천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아 나타날 수 있지만, 그 투쟁의 결과는 다시 이론적 발전을 촉진하여 더 나은 실천의 길을 열어준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단순히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천 속에서 현실과 상호작용하면서 유의미해진다는 점을 입증한다.
프롤레타리아트: 사유 주체로서의 계급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단순히 억압받는 계급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선 입장으로서 사회 변혁의 능동적 주체로서 위치시킨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 "순수한 법칙의 숙명론"과 "순수한 심성의 윤리학"이라는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 길을 모색한다.
"순수 법칙의 숙명론"은 사회를 자연법칙처럼 불변하고 결정된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순수 심성의 윤리학"은 개인의 도덕적 이상에만 기댄 변화론을 의미한다.(도덕주의가 아닐까 싶다) 루카치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천을 통해 이 두 관점의 무력함을 극복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실천성을 강조하는 논의로 연결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실생활에서 직접적인 투쟁과 행위 속에서 계급의식을 획득하고 발전시킨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적 과제를 스스로 깨닫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변혁시키는 능동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계급의식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며, 투쟁과 실천 속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유지된다. 이러한 접근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단순히 역사적 희생자가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서 역할을 수행함을 보여준다.
당과 혁명가의 역할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과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를 조직화하고 이끄는 "당"과 개별 투쟁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루카치에 따르면,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은 사회 전체의 총체적 과정일 뿐만 아니라, 당과 개별 투쟁가들의 실천 속에서도 구현되어야 한다.
당과 그 속의 혁명가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단순히 학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상징적 구호가 아니라 실제로 투쟁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이들이 자신의 행동 속에서 이론을 체화하고, 이론적 통찰을 실천 속에서 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이는 마르크스의 이정표인 “철학은 세계를 단지 해석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변혁해야 한다”는 문장과 맥을 같이 한다. 루카치는 당과 혁명가들이 이 이론-실천의 통일을 자신들의 실천 속으로 끌어들일 때 비로소 자신들이 주장하는 이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주장한다
1921년 쓰인 루카치의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를 단순히 관념적인 이론이나 철학적 숙명론을 넘어서는 실천적 철학으로 풀어낸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론적으로 계급적 시각에서의 비판은 사회 현상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실천을 통해 검증되고, 실천은 이론을 통해 방향과 목표를 부여받는다.
루카치가 분석한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순한 계급적 피해자가 아닌 역사적 변화를 이끄는 사유적이고 실천적인 주체로 자리 잡는다. 이를 위해 당과 개별 혁명가들 역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자기 실천 속으로 끌어들여야 하며, 이를 통해 사회적 현실에 깊이 침투하고 변혁의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루카치의 논의는 이론과 실천의 긴밀한 결합을 통해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의 진정한 힘을 보여준다.
물론, 전체적으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헤겔의 역사철학의 낙관론으로 해석한 부분도 있고, ' 노동귀족' 등 부분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내용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역사와 계급의식》은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고전 중 하나이다.
여기서 루카치는 오늘날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실천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며, 우리의 이론과 행동은 어떻게 서로를 강화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이렇게 답해본다. "과거가 미래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