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에로스와 몰락: 이안 감독의 영화 《색, 계》를 중심으로 한 비평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에로스가 용기의 면에서 아레스보다도 뛰어나다고 말한다. 에로스는 단순한 욕망을 넘어 삶을 변화시키는 열정과 상상력의 원천이지만, 동시에 파멸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지닌다. 현대 철학자들, 예컨대 알랭 바디우나 한병철처럼, 에로스의 전복적 에너지에 주목해왔다. 그러나 에로스의 광휘 아래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는 종종 정치적·개인적 붕괴로 이어진다. 이안 감독의 영화 《색, 계》는 이 파멸적 에로스의 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1940년대 일본 점령기 중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사랑과 신념, 욕망과 배신의 복잡한 교차로를 그린다. 애국심을 품은 청년 왕치아즈가 스파이로서 적을 유혹하고 암살하려는 계획 속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결국 사랑에 무너지는 비극적 서사를 담고 있다. 영화는 단순히 육체적 쾌락의 재현을 넘어, 에로스를 통해 인간의 내면,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욕망과 권력의 불가분한 관계를 깊이 탐구한다.
사랑과 신념, 욕망과 배신의 교차로
영화는 마작을 즐기는 왕치아즈(탕웨이)와 부인들의 일상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주부가 아니라, 중국 애국운동에 몸담고 있는 스파이다.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에 속해 있던 왕치아즈는 동료들과 함께 반(反)일본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들은 단순한 연극 무대에서의 열망을 넘어, 친일파 주요 인물 이모청(양조위)을 암살하기 위한 스파이 작전을 계획한다.
암살을 위해 왕치아즈는 이모청의 아내를 접근 대상으로 삼아 그의 사회적 서클에 진입한다. 마침내 그녀는 가짜 신분으로 이모청을 유혹하며 그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임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단순히 국가나 이념을 위해 활동하는 존재를 넘어, 이모청과의 관계 속에서 예상치 못한 복잡한 감정과 얽혀버린다.
이모청 역시 왕치아즈를 단순히 욕망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는 권력자인 동시에 고독하고 취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며,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임무나 정복의 차원을 넘어선다. 관계는 단절과 결합, 의존과 파괴의 역설 속에서 진동한다. 이로 인해 에로스는 이데올로기적 충돌을 야기하는 도구임과 동시에,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감정적 동력으로 작용한다.
영화가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왕치아즈는 암살을 실행할 결정적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이모청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경고하며 작전을 망친다. 결국 이모청은 살아남고, 왕치아즈와 동료들은 처형된다. 이는 에로스가 신념과 충돌할 때, 얼마나 강렬하게 인간의 의지를 변질시키는지를 드러낸다.
에로스를 통한 인물의 내면 탐구
이안 감독은 에로스를 플롯의 윤활제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로스는 인물의 심리와 사건의 전개를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핵심 장치가 된다. 영화에서 성적 관계는 단순한 욕망의 표현에 머물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심리와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특히 두 사람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장면은 탐욕스럽거나 관능적이지 않다. 오히려 카메라는 그들의 긴장과 폭력, 그리고 억눌린 감정을 신중하게 따라간다. 첫 만남에서의 성관계는 냉정하고 대립적이며, 관계의 시작이 풀리지 않은 이상과 위태로움을 상징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적 교감은 두 인물 간의 내면적 취약성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아이러니한 감정이 성적 표현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왕치아즈가 스스로 계획에서 점점 이탈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명료한 장치는 이들의 성적 관계를 통해 발생한다. 신념을 위해 시작된 관계가 에로스에 의해 변질되는 과정은 성관계를 통해 점차 구체화된다. 특히 세 번째 성관계에서 여성 상위 체위로 설정된 장면은 그녀가 더 이상 임무의 주체가 아닌, 그 관계 속 본인의 주체성을 점차 잃어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연출의 특징: 침묵, 빛, 그리고 일상
《색, 계》가 에로스를 심미적이면서도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데에는 이안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빛을 발한다. 그중에서도 침묵의 사용, 빛과 그림자의 대비, 그리고 반복적 일상 속에 숨겨진 긴장의 활용이 주요한 특징으로 꼽힌다.
1. 침묵과 비언어적 표현
이안은 성적 장면과 대치를 포함한 주요 장면에서 대사를 최소화한다. 왕치아즈와 이모청이 끊임없이 서로를 ‘관찰’하는 순간들은 대사보다 시선과 미묘한 표정 변화로 채워진다. 침묵 속에서 관객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억압된 욕망과 갈등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사건을 드러내는 대신, 인물 내면의 복잡한 흐름에 몰입하게 만든다.
2. 빛과 그림자의 상징적 활용
영화 초반 왕치아즈의 모습은 밝고 균형 잡힌 조명으로 비춰진다. 그녀가 연극 무대 위에서 국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장면은 이러한 조명을 통해 강조된다. 하지만 이모청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조명은 점점 어두워지고, 그녀의 얼굴은 그림자로 뒤덮인다. 빛과 그림자는 그녀의 분열된 정체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며 심리적 전환을 표현한다.
3. 일상적 미장센의 긴장감
일상적 행위는 영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미장센으로 활용된다. 마작이나 부엌에서의 대화, 상류 사회의 일상적 모습들이 단조롭게 펼쳐지는 동시에, 그 이면에 숨겨진 감정적·정치적 긴장은 영화 전체의 톤을 형성한다. 이러한 평범함 속 긴장은 영화의 몰입도를 한층 더 높인다.
에로스의 비극적 아이러니
《색, 계》는 인간의 가장 사적인 감정인 에로스를 정치적 배경과 결합시켜, 그 파멸적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에로스는 국가와 신념을 배반하게 만들고, 서로를 파괴하면서도 의지하게 만드는 인간 감정의 가장 역설적인 영역이다. 이는 왕치아즈와 이모청의 관계를 통해 반복적으로 암시된다.
정치적으로 보면 영화는 친일파에 매료되어 변절자의 길을 걸은 스파이를 다루지만, 단순한 역사적 관점을 넘어 인간과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한 파멸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색, 계》는 신념과 에로스, 이성적 층위와 감각적 층위 사이의 처절한 투쟁을 통해 아시아 영화사에서 멜로드라마를 철학적으로 확장한 걸작으로 남았다. 이안 감독은 에로스의 어두운 저편을 입체적으로 풀어내며, 그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인간이란 절대적 신념으로 움직이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욕망하는 대상이며、그 핵심 원천인 에로스는 언제나 혁명적이다. 그리고 혁명과 파멸의 경계선에서, 한 번 더 불완전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