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 대한 이상화와 그 비판
-헤겔 정신현상학 해설서를 읽으며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철학사에서 정신의 발전 과정을 서사적으로 탐구한 명작이다. 그러나 이 서사 속에서 드러나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 대한 이상화는 지나치게 들러나는데, 이것은 단지 헤겔 개인의 미학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당대 지식인들, 특히 친구였던 횔덜린, 셸링을 비롯한 그의 동시대 지식인들 역시 고대 그리스를 완전하고 통합된 공동체의 이상으로 낭만화했다. 이는 낭만적 보수주의-낭만적 반자본주의의의 탈출구이자, 그들이 마주한 근대적 소외의 문제를 미화된 과거 속에서 해결하고자 했던 일종의 역사적 도피였다.
그러나 이런 고대 그리스에 대한 찬양과 낭만화는 근대적 현실, 특히 자본주의적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을 비판적으로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역기능을 가진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관점에서 이는 명백한 역사적 오류이자, 실천적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헤겔이 그리스를 인간 사회의 초기 이상적 단계로 설정하면서 그 공동체를 조화로운 윤리적 삶의 전형으로 제시했지만, 그가 이상화한 폴리스의 시민 사회는 실제로는 노예제와 계급적 불평등 위에 성립된 사회였다. 곧, 그와 횔덜린이 사랑했던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전 시민의 공공선이 아니라, 소수의 자유시민이 노예 노동을 착취하며 이루어진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었다. 물론, 법이 아닌 시민들의 제한된 민주주의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고대 로마보다는 진보한 면이 있을 수도 있지만, 거시적에서 이 두 사회는 같은 계급 사회임은 틀림없다.
헤겔의 전반적인 철학 체계가 역사적 발전을 "부정의 부정을 통한 절대정신의 완성"으로 설정한 것은, 모든 역사적 형식을 일종의 필연적 단계로 보는 입장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넘어서기 위한 변혁적 관점보다는, 역사를 정당화하는 관념론적 해석에 가까워진다. 역사는 절대정신이 아닌 억압닫는 민중이 주체이며, 관념이 아닌 계급의식에 의해 움직인다.
헤겔의 고대 그리스 이상화는 이러한 관념론의 특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사회를 상상하기보다는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적 순간을 낭만화하면서, 현재의 모순을 초월하려는 시도 자체를 차단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의 관념론적 한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사회의 발전과 역사적 진보는 단순히 정신의 자기실현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적 생산 관계와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구체적이고도 갈등적인 운동이다. 고대 그리스에 대한 낭만적 환상은, 결국 자본주의가 야기한 불평등과 소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거나, 이를 논의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헤겔의 세계관에서 폴리스는 절대정신이라는 관념적 구도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돌이켜 묻는다. 그 조화롭다는 공동체가 어떤 계급적 억압과 착취에 기초해 유지되었는지를. 낭만의 이름으로 은폐된 계급사회의 모순을 꼬집어야 한다. 헤겔이 그리스의 통합된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던 것은 그의 시대적 조건에서 이해될 수 있지만,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를 넘어서기 위한 전망을 기대하기에는 한계가 명백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화된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과정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실천적 태도다. 고대 그리스 속 서사시가 아닌, 현실에서 민중의 서사시를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