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동양판타지의 신곡, <천녀유혼>

by 꿈꾸는 곰돌이

<천녀유혼>(1987)은 동아시아의 신화의 상상력과 서구 낭만주의의 서사를 절묘하게 엮어낸 걸작이다. 초현실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이 영화는 정통적인 무협 판타지의 외형을 가지면서도, 그 중심부에 고대 동양 설화들의 영적 세계관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심어놓는 걸작이다.

<천녀유혼>의 주제는 뻔하다 할 수 있는 주제-불가능한 사랑이다. 그중에서도 인간과 초월적 존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데, 이 고전적 요소를 현대적 연출로 장국영이 연기한 순수하고 소심한 서생 ‘영채신'과 왕조현이 연기한 비극적 영혼 ‘섭소천’의 사랑은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신성과 현세 사이의 긴장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 서사는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추구하며 천상과 지옥을 관통하는 여정을 떠나는 것과 유사하다. 섭제천의 애절한 혼은 베아트리체처럼 인간을 신성한 영역으로 이끄는 체현자이며, 동시에 자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귀신의 존재다.
영채신은 베르길리우스처럼 섭제천의 세계로 들어가지만, ‘구원자’의 자리는 자신이 아닌 도사 ‘연적하’에게 맡겨져 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여기에는 낭만적 사랑의 숭고함과 인간의 유한성이 대비되며, 관객은 서사가 요구하는 윤리적 질문 앞에 놓이게 된다. 귀신(소천)은 인간(채신)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이라는 감정은 현실 세계와 초월적 영역을 초월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고전과 오늘 날의 동양판타지를 잇는 중간원형이라고 하고 싶다.


귀신과 인간의 서사: 동양판 신곡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천녀유혼>은 극과 극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대조를 이루는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귀신과 도사의 대립, 어둠과 빛, 사랑과 의리, 현생과 죽음 등의 대립은 서사의 주요 동력이 된다. 특히 연적하와 영채신의 관계는 도사와 서생의 관계를 넘어, 인간성의 두 가지 측면을 구현한 대립 역할을 한다. 영채신은 감성과 순수한 인간적 사랑을 대표하지만, 연적하라는 캐릭터는 마치 신곡의 심판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두 캐릭터의 협력과 충돌은 서사의 긴장감을 더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 자체로 신학적이면서도 현실의 질문들로 가득 차 있다. 섭제천은 영원히 죽음과 고통 속에 묶일 운명이었지만, 결국 채신과의 사랑이 그녀를 구원으로 이끈다. 이 과정을 통해 <천녀유혼>은 고대 구조적 서사(희생과 구원, 사랑과 초월)를 현대적이고 감성적인 판타지로 재창조해낸다. 특히 영채신의 서사는 조지 캠벨이 이야기한 《천의 얼굴을 한 영웅들》에서 묘사된 영웅서사와 유사하다. 물론 너무 다급하게 끝난 감이 있지만, 신화 속 영웅의 서사를 평범한 서생의 관점으로 풀어내면서도 《신곡》의 서사를 따라갔다는 점에서도 훌륭한 작품이다.


동양 판타지 연출의 정점


<천녀유혼>에서 등장하는 하늘을 가린 숲, 귀신들의 무덤, 어둡고 음산한 세계는 단테가 겪었던 지옥적인 공간으로 연출된다. 특히 이 공간은 르네상스와 중세 문학에서 묘사된, 단테가 깨어난 어두운 숲과 닮아 있다. 단테가 지옥문 앞에서 공포와 무력감에 사로잡히듯, 관객 역시 이 미장센에 서린 불안과 미지의 공포에 압도된다. 하지만 이 공간이 죽음과 파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점차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숲은 귀신과 인간의 영적 대화가 이루어지는 매개체로 드러나며, 현실의 한계를 초월한 사랑과 희생을 가능케 하는 경계적인 장소로 재해석된다.


당대 최고의 보석


이 영화는 서사 및 동양풍의 낭만적 분위기라는 연출로만 고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배우의 아우라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장국영과 왕조현의 존재감은 카메라 안에서 그 자체의 아우라를 풍기며, 연인의 슬픔과 비극은 프레임을 채운 자연 풍광과 어우러진다. 단테가 <신곡>을 통해 어둠과 빛의 대립을 서정적 문체로 표현했다면, <천녀유혼>은 이를 빛과 안개, 달빛과 그림자, 그리고 훌륭한 배우로 시각적으로 구현해냈다. 특히 장국영 특유의 감미로우면서도 불확실한 표정 연기는 영혼의 내면적 방황을 표현하며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 오직 장국영만 할 수 있는 연기다. 개인적으로 장국영 3대 영화로 《영웅본색》, 《패왕별희》 그리고 《천녀유혼》을 뽑고 싶다.


장국영과 왕조현 주연의 <천녀유혼>은 뻔한 낭만적 판타지가 홍콩 영화의 <신곡>이라 단테 <신곡>의 서사 구조와 캐릭터의 대비, 세계관의 대립 속에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감정과 고통을 다룬 점에서 <천녀유혼>이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다. 피빛 홍콩 느와르와 코믹액션이 가득했던 80년대 홍콩을 사랑의 이름을 남긴 명작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진보적 마초는 가능한가? (Feat.영웅본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