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호, <리얼리즘 논쟁(루카치, 브레히트, 고리끼)>, 노사과연
루카치의 정의에 따라 리얼리즘의 특성을 요약해보자면, 우선 구체적이며 생동감 있는, 그리고 실체적인 인간의 상황을 재창조한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구체적 리얼리즘과는 대비되는, 즉 결코 인간적인 것을 획득하지 못한 채, 그저 막연히 분위기에 근거하여 심리주의로 해소해버리는, 운명주의로 귀결 짓고 마는 추상적 경향성을 부정하였다.
첫째로 루카치는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문학사를 재검토하는 데 이용하였다. 그는 뷔히너의 예를 들면서, 나찌가 뷔히너를 민족적 사회주의적 작가라는 식의 해석을 내리는 데 대해 뷔히너는 특정한 혁명, 즉 프랑스 혁명의 작가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였다.
둘째는 삶에 대한 총체적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총체성'이란 결코 양적인 개념이 아니다. 루카치는 끝없는 세부묘사를 통해 총체성의 환상을 추구하려고 했던 자연주의자를 비판하면서, ‘위대한 리얼리즘’의 총체성은 여러 가지 요소의 합성음이며 세부적인 묘사는 전체적인 묘사에 긴요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셋째는 전형성이다. 일상생활은 무질서하며 중복되기 일쑤이기에 이처럼 우연적인 경험 속에서 대표적이고도 중요한 것을 변별하여 이를 순차적으로 재정리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말한다. 아울러 루카치는 전형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특수성이라는 미학적 범주(category)를 사용하였는데, 여기에서 특수성이란 특정 사건, 개인의 혹은 사물의 개별성은 물론, 현존재의 보편적 맥락에 관계된 모든 것을 간파하는 하나의 범주를 말한다. 물론 특수성은 민족적, 역사적 개별성을 표면에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네 번째 특징으로는 사회적 존재와 개인의 특수적 소우주와의 변증법에서 보이는 헤겔적 맑스주의의 변증법적 논리이다. 개인과 사물 내에 존재하는 갈등들의 특성과 이들의 내적 역동성에 내재되어 있는 경향성을 파악하는 것이 리얼리즘 작가의 과제라고 말한다.
다섯 번째 특성으로는 위임(commitment)의 문제이다. 작가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위임할 수밖에 없다. 즉 작가 자신은 지각된 현실에 대한 그의 객관적 판단, 자신의 인간성, 그리고 변증법적 방식으로 자신의 경험을 반영할 수 있는 능력에 위임할 수밖에 없으므로 오늘날 위대한 예술가란 부르주아적 현실의 거센 조류를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루카치는 ≪역사 소설론≫에서 겉보기에 직접 경험한 동시대의 사건을 기술하는 데 가장 적격으로 보이는 리얼리즘이 역사에 적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루카치는 리얼리즘을 이데올로기로서 정의했던 것처럼 문학적 사조로 취급하면서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의 경계선을 분명히 긋고자 했다. 낭만주의를 신성동맹의 예술적 반영으로 바라보면서 철저한 반동의 운동으로 규정했다. 프랑스 대혁명과 1848년-1849년의 혁명의 대로를 닦은 것은 낭만주의가 아니라 고전주의라고 하면서 낭만주의에 증오감을 표시하는데, 이는 낭만주의를 극도로 단순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루카치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이후 사회주의 작가와 비평가들에게 하나의 의무조항이었으며 당에 의해 보장을 받았던 쏘비에뜨의 예술적 낙관주의, 또는 소위 ‘혁명적 낭만주의’에 반대를 하였던 것이다.
루카치는 문학에 대한 당의 교조적 자세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비판을 했고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이 주인공과 인간의 의식에 대해 지나치게 경시하고 있다는 측면에 항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플롯을 단순화, 획일화하려는 경향과 테마를 우화로 만들어버리려는 경향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 게다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예언자적 문학이 아니며 그러기에 특정 기준을 설정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자기만족과 정치적인 혹은 여타의 목적을 위해 예술적 가치를 상실하는 것을 두고 엄중히 경고를 한다. 그래서 그는 고리끼, 즈다노프주의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해석, 즉 리얼리즘보다 우월한 그 무엇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규정하는 방식을 결코 수용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역시 우선적으로 리얼리즘이었던 것이다.
(노사과연 특유의 스탈린주의적 해석이 보인다. 루카치는 스탈린주의의 획일화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아닌 비판적 리얼리즘을 꿈꿨다는 이택광 교수의 말이 옳다고 본다. 오래전에 절판된 <리얼리즘 미학의 기초이론>의 글은 너무 어렵고 난해한데, 이를 잘 풀어낸 김경식 교수의 <루카치의 길: 문제적 개인에서 공산주의자로> 를 읽고 썼다. 다만 노사과연 논문이 요약이 잘되어 이것을 가져왔다.)
루카치 리얼리즘 이론 한계 비판
루카치의 리얼리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 및 좌파적 비평 전반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기여를 했다. 괜히 철학계의 마르크스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와 동시에 여러 비판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고, '루카치언'을 자처하는 내 관점에서도 루카치의 한계와 약점이 보인다. 그는 문학을 독특한 방식으로 분석하며 리얼리즘을 "총체성," "전형성," 그리고 "사회적 존재와 개인의 변증법"이라는 요소를 포함한 구도로 정의하려 했지만, 그의 이론에는 한계와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그의 리얼리즘 이론은 기본적으로 모순적인 부분이 존재하며, 지나치게 범주화와 획일화가 단점이라고 생각된다.
1. "총체성"의 환원적 구조
루카치의 리얼리즘에서 중요한 개념인 "총체성"은 다양한 요소가 결합하여 삶-사회를 드러내는 구조로 정의된다. 이는 헤겔로부터 이어져온 오래된 전통인데, 그는 이 총체성을 단순한 세부 묘사의 축적으로 환원시킨 자연주의자들과의 차별을 강조했지만, 정작 그의 총체성 개념 또한 지나치게 목적론적이고 규범적이다. 문학
이 "총체성"을 통해 세계를 조망한다고 했을 때, 모든 작품이 반드시 특정한 이념적 또는 역사적 "전체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문학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삶을 얼마나 입체적이게 다루냐에 따라 문학 작품의 의미가 확장될 수 있음에도 루카치는 지나치게 체계적이고 완결된 세계관을 문학에 강요하며, 미학적 다양성과 해석의 열림을 제한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2. "전형성"의 문제
루카치가 말한 "전형성"은 개별적 사건과 삶의 구체적인 맥락에서 중요한 요소를 추출해내는 과정이다. 그는 문학이 우연적이고 무질서한 현실을 재조직하여 이런 "전형적"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의 다양한 양상과 복잡성을 단일한 시점이나 구조로 축소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루카치는 특정 사건 혹은 인물을 "역사적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전형화하려고 한다. 근데, 이것이
이러한 "전형성"의 경직성은 루카치가 발터 벤야민과의 논쟁에서 특히 드러난다. 그 유명한 벤야민이 프란츠 카프카의 문학처럼 모호하고 불안정한 서사를 통해 자본주의적 근대를 은유적으로 비판한 반면, 루카치는 카프카 문학을 전형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평가 절하했다. 모더니즘을 반동적 기조로 묘사한 것도 넓게 보면 과했다는 문제다. 모더니즘 기법을 너무 간과한 것이다. "리얼리즘"은 전형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며, 비전형적 실험이나 특징을 간과했고, 이러한 경향은 문학의 다양성을 헤칠 수 있다.
3. 리얼리즘과 낭만주의의 경계 설정 문제와 지나친 비판
루카치는 낭만주의를 철저히 반동적인 사조로 규정하며 리얼리즘과 명확히 대립시켰다. 그는 낭만주의를 "신성동맹의 예술적 반영"으로 격하시키고, 이를 이상화된 환상이나 현실 도피의 실천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낭만주의에 대한 이러한 단선적 해석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시각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낭만주의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특히 모든 문학적 낭만주의가 반동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예컨대, 낭만적 요소를 활용한 비판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예: 독일 초기 낭만주의 문학-절대소설로 불린 횔덜린의 휘페리온 혹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등)은 루카치가 의도적으로 비난한 것 같다.
또한 그는 "프랑스 대혁명과 1848-1849년의 혁명의 길을 닦은 것은 낭만주의가 아니라 고전주의"라고 주장하며, 낭만주의를 계급 투쟁에 기여하지 못한 퇴행적 흐름으로 단정했다. 이것이 총체성을 강조하는 그의 철학과 연관성 높은 점은 이해하나, 이는 문학을 지나치게 단면적으로 바라볼 때 나타나는 오류라 하고 싶다. 예술이 반드시 혁명적 정치 의식을 담아야만 가치가 있다고 보는 관점은 문학적 다양성과 다의성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문제를 낳는다. 문학은 정치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지만, 문학은 정치와 다르며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근본은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라고 생각한다.
4.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당파적 예술관에 대한 모순
루카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리얼리즘의 연장선상"으로 정의하고, 이는 이념적 목적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소위 당파적 예술관을 비판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이론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 역사관과 당파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창작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고리끼나 즈다노프주의처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종교적 경건함으로 다룬 태도를 비판했지만, 그 자신 역시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통해 특정 문학적 접근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를 지속해서 보였다. 결국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틀 안에서조차 루카치는 문학이 당파적으로 편향될 여지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모순은 문학 창작의 자율성을 유지하려던 의도와, 마르크스주의적 사관을 문학에 적용하려던 루카치의 욕망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것이 가장 큰 모순이다. 그는 당의 교조적 통제와 사회주의 낙관주의를 비판했지만, 그의 리얼리즘 이론 자체가 여전히 획일화되어 있고, 정치와 문학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루카치의 리얼리즘 이론은 문학의 사회적 책임과 역사적 맥락을 강조함으로써 문학 비평의 이론적 토대를, 한국에서도 특히 좌파적 문학 이론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여담이지만 우파는 바슐라르였다고. 다만 창비가 루카치-리얼리즘-민중문학을 주장한 것에 억지로 맞춰짜기인 것 같다. 바슐라르가 비정치적인 것은 맞으나, 한국에 대표적인 바슐라르 연구자인 김현은 우파가 아니다!) 특히 소련 붕괴 전, 80년대 민중문학에서 그가 제시한 총체성, 전형성 개념과 문학의 정치적 의무는 지나치게 규범적이고 협소한 시각으로 이어졌다. 그의 이론은 창작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간과했고, 실험적이고 비전형적인 양식을 평가절하했으며, 특정한 역사적 서사를 강조함으로써 문학의 본질적인 자율성을 제한했다. 이러한 한계에 소련 붕괴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조류에서 그는 죽은 개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총체성을 끌고간 루카치와 리얼리즘 이론은 총체성을 부정하는 오늘날 유일하게 우리가 가야할 곳을 일러주는 강력한 빛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에서, 핵심은 감각적인 것의 분배다. 리얼리즘은 감각적인 것을 분배하는 주요한 전술중 하나이지만, 리얼리즘적 방식만이 유일한 예술방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P.S 조금 모호한 결론인 것 같다. 결국 모더니즘도 열어두자는 것이 핵심인데, 반대로 오늘날 문학에서 리얼리즘의 파이는 너무 줄어든 것 같다. 당장 한국 문학의 경우 90년대 김소진 이후 루카치의 시선에서 제대로 된 리얼리스트는 없다. 루카치 비판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루카치언이 없다는 한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