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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록물고기>

은어가 될 수 없던 초록 물고기

by 꿈꾸는 곰돌이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 <초록물고기>는 1997년, 한국 자본주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세상에 나왔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시대의 초상을 담아낸, 20세기 불후의 명작이라 평가한다. 가장 화려했던 자본주의의 이면을, 순수했던 시골 청년의 허무주의적 방황과 타락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순수했던 청년 막동이 군 제대 후 고향에 돌아와 이미 사라진 평화와 가족의 온기를 찾아 헤매는 모습은 물질 자본주의 속 인간의 소외를 보여준다. 배경 또한 3기 신도시가 지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보면 흥미롭다. 도시는 서울을 넘어 일산신도시까지 확장되었고, 영화는 일산신도시와 영등포를 무대로 막동의 비극적 서사를 그린다. 막동은 가족과 사랑을 지키기 위해 폭력의 세계로 들어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허우적대다 결국 파멸에 이른다. 이 영화는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시골 청년의 순수함이 어떻게 짓밟히고 절망적 허무로 변해가는지 처절하게 보여준다. <초록 물고기>는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 걸작으로, 이 글에서는 허무주의적 에로스를 중심으로 플롯을 설명하고, 일산신도시를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으로 분석한다. 나아가 동시대에 쓰인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과 비교하여 작품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1. 허무주의와 에로스, 후기 자본주의 플롯의 중심

막동의 여정은 거대한 허무주의적 자본주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파괴적 에로스의 이야기다. 그가 우연히 만난 미애(심혜진 분)를 향한 감정은 성스러운 에로스와 닮아 있다. 미애는 사소한 우연으로 막동에게 다가왔지만, 그녀는 막동이 마주한 도시의 환락과 위태로운 생존 방식을 잊게 만드는 베아트리체 같은 존재다. 그래서 미애는 막동에게 유일한 '아름다움' 혹은 '살아갈 이유'였을 것이다. 그녀는 밤의 세계에서 노래하고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지만, 막동에게는 여전히 순수했던 시절의 고향 풍경처럼 따뜻하고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존재였다. 막동은 그 초록빛 환영을 붙잡기 위해 발버둥 치며 조직폭력배의 세계로 뛰어든다.



그러나 막동의 에로스는 파괴적이다. 프로이트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변증법적 관계를 설명했듯, 진정한 에로스를 위해서는 목숨마저 바칠 각오가 필요하다. 하지만 막동이 미애와 가족에게 보여주려는 사랑은 현실의 비정함 앞에서 폭력과 절망으로 점철된다. 미애와의 관계는 그에게 구원이 아니라, 더욱 깊은 나락으로 이끄는 통로가 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순수한 감정이나 본능적 에로스마저 자본과 폭력의 시스템에 의해 어떻게 변질되고 소모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단면이다. 막동의 허무주의는 모든 것의 무의미함을 인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무의미 속에서 무모하게 대상을 좇다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죽음으로 향하는 허무주의로 치닫는다. 그가 지키려던 순수와 에로스는 결국 거대한 폭력 앞에서 산산조각 나며, 이는 순수가 통하지 않는 세상, 인간적인 가치들이 마모된 시대를 향한 감독의 냉소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2. 고향 상실의 시대, 일산신도시와 하이데거의 실존



<초록물고기>의 배경인 일산신도시는 영화의 핵심 주제인 '고향 상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공간이다. 막동이 부모와 형제들과 함께 고향집에 돌아왔을 때, 그를 반긴 것은 정겹던 시골집이 아니라 낯설고 인공적인 신도시의 풍경이었다. 효율을 추구하며 계획적으로 건설된 도시에서는 인간 공동체의 유대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막동 가족의 물리적 이동을 넘어,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사라진 전통적 가치와 공동체 의식, 즉 정신적 '고향'의 상실을 의미한다.



막동과 그의 가족의 고향 상실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 망각'과 '비본래적 삶'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 문명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과 세계의 본질적 관계를 잊게 만들고, '세인(das Man)'이라는 비개인적이고 익명적인 존재 방식으로 살아가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막동은 더 이상 본질적이고 친밀했던 세계-내-존재가 될 수 없는, 낯설고 비인간적인 환경에 던져진 존재이다. 그가 돌아온 '고향'은 이제 그의 '현존재(Dasein)'가 자신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를 고립시키고 소외시키는 익명의 공간일 뿐이다.



영화 속 막동의 고향집이 헐리고 가족들이 흩어지는 모습은, 단순한 재개발의 풍경을 넘어 존재의 근본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실존적 위기를 형상화한다. 그는 낯선 도시의 풍경과 차가운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고, 결국 허무한 폭력의 길을 택하며 비본래적 삶의 극단적 파국에 이른다. 이는 개발 지상주의가 파괴한 것이 환경만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실존적 기반이라는 하이데거의 묵시록적 경고와 맥을 같이한다.



3. 윤대녕의 은어와 <초록물고기>의 향수, 그리고 절멸



<초록물고기>의 제목에 담긴 '초록물고기'는 막동에게 유년 시절의 순수함과 가족 모두가 함께 작은 식당을 열겠다는 소박하고 목가적인 꿈을 상징한다. 도시의 어두운 폭력과 욕망 속에서 초록물고기는 순수와 이상,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목가적 세계에 대한 처절한 향수를 대변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작중에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윤대녕의 소설 <은어낚시통신>에 등장하는 '은어'와 흥미로운 비교점이 생긴다. <은어낚시통신>은 1990년대 후반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작품으로, 도시인의 삶에 지친 주인공이 유년 시절의 신비로운 기억과 삶의 잊혀진 시원을 찾아가는 매개체로 '은어'를 활용한다. 은어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상실된 순수함과 본질적인 자아를 회복하려는 은유적 시도로 그려진다. 이 작품은 급속한 현대화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상실감과 소외감을 깊이 있게 다루면서도, 자연으로의 회귀와 순수성 복원을 통해 '치유'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즉, 자본주의의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도 목가적 형태의 '비상'과 '회귀'를 꿈꾼다는 점에서 문학적 의의가 크다. 두 작품 모두 '물고기'라는 상징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잃어버린 순수와 자연, 그리고 본질적인 삶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그 '물고기'가 향하는 종착점은 확연히 다르다. <은어낚시통신>의 은어는 주인공에게 과거로의 회귀와 동시에 새로운 삶의 의미를 탐색할 가능성을 부여한다. 윤대녕의 은어가 다소 낭만적이고 사색적인 '치유와 회복'의 희미한 실마리를 제공한다면, 이창동의 초록물고기는 잔혹한 도시의 현실 앞에서 철저하게 '파괴되고 절멸하는 순수'를 상징한다. 막동이 끝내 초록물고기를 만날 수 없었듯이, (아마 인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막동의 최후에 흘리는 피에서 초록 물고기가 헤엄쳤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영화는 초록물고기로 대변되는 목가적인 꿈이 도시의 폭력에 의해 어떻게 무참히 짓밟히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결론: 시대의 상흔을 담아낸, 비극적 초록빛 진실



이창동의 <초록물고기>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만들어낸 잃어버린 고향과 그 속에 숨 쉬던 순수함에 대한 가슴 아픈 초상화다. 작품은 순수를 지키려다 결국 파멸에 이르는 한 개인의 비극을 통해 냉혹한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을 폭로한다. 막동의 비극적 최후는 아마도 이 타락한 도시가 더 이상 순수한 꿈이나 인간적 감성조차 수용할 수 없다는 처절한 현실을 상징한다. 영화는 한국의 황금기로 불리던 물질 중심 사회의 가장 어두운 면을 냉정하게 포착해낸다. 흔히 사용되는 '갱스터 리얼리즘' 장르의 틀을 초월하여, 급변하는 시대가 개인의 존재와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초록물고기>는 한국 영화사에 영원히 남을 걸작이자, 시대를 꿰뚫는 초록빛 비극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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