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정역, 초라함에서 찬란함으로
나는 운정 신도시에 산다. 그런 내게 경의중앙선 운정역은 애증의 공간이다. 홍대입구까지 40분도 채 안 걸리는 편리함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배차 간격이 길고 지연도 잦은 이 역은 내게 어딘가 알 수 없는 이질감을 준다. 이 역은 주변에는 오는 8월이면 49층 주상복합인 힐스테이트 더 운정의 입주가 시작될 정도로, 신도시 역세권의 힘을 얻어 엄청난 번화가로 개발되었다. 사실 이 역은 한가하고 아무것도 없는 서울 근교의 상징과도 같은 역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초록 물고기>와 김유민 감독의 <노랑머리>에도 등장해한다. 그때 운정의 풍경은 신도시 개발 전의 초라한 모습 그대로였다. 경의중앙선도 아닌 통근열차가 다니던 시기, 역주변에 작은 구멍 가게 외에는 비닐하우스와 논만 있는 곳이었다. 바로 그 모습을 바탕으로, 지금의 운정과 30년 전의 운정을 겹쳐 본다.
영화 속에서 20세기의 운정은 서울 근교로서, 서울에서 소외된 인물들의 목가적인 꿈을 펼치기 위한 도피처로 묘사된다. 빽빽한 아파트 숲 대신 논과 비닐하우스만 있었고, 아스팔트 대신 흙먼지 날리던 길이 있었다. 그 시절 운정역은 고요했을 거다. 사람들의 발길은 뜸하고, 기차가 멈춰서는 잠깐의 정적만이 흐르는, 한적한 시골 간이역 같은 곳. '신도시'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거리가 먼, 파주의 중심 금촌과 일산 신도시 사이 파주의 한 시골 마을에 불과했던 운정의 옛 풍경에서 사라져 버린 과거에 대한 묘한 향수, 그리고 어딘가 모를 허무를 느낀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21세기에 운정은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신도시 개발이라는 거대한 물결은 막을 수 없었고, '서울 접근성 향상'이라는 명목 아래 운정은 자본 축적의 행운을 누렸다. 약 20년에 걸쳐 진행된 개발은 운정을 교통, 상업, 주거의 핵심지로 만들었다. (물론 아직도 개발 중이다) 여러 마을도서관, 운정광역보건지소 같은 공공시설이 생기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운정역 주변으로는 오피스텔과 지식산업센터, 프랜차이즈 매장들이 번화가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인구가 계속 유입되면서 편리함을 극대화한 현대적인 주거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신도시 개발이 가져온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계획성'이라고 생각한다. 무질서한 난개발 대신, 깔끔하게 정비된 도로망, 넓은 녹지 공간, 필요한 시설들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오래된 도시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잘 꾸며진 공원과 산책로는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 또 경의중앙선을 통해 서울 도심까지 빠르게 갈 수 있게 되면서, 수도권 직장인들에게 운정은 매력적인 주거지가 되었다. 이러한 인프라 확충은 신도시가 스스로 자립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런 잘 정비된 이 길을 걸을 때마다 효율성에 감탄하곤 한다.
하지만 장점만큼이나 그림자도 짙다. 신도시 개발의 가장 큰 단점은 '고향 상실'이다. 신도시는 아무리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 문명의 그림자를 감출 수 없다. 존재자에서 존재가 빠져나가며, 고요한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 그 곳이 근대 도시다. 개발 이전의 자연 경관이나 마을 특유의 정취는 사라졌다. 개성 없이 똑같이 생긴 아파트 건물들이 빈틈없이 들어선다. 게다가 역주변에는 투기용 오피스텔이 들어서있다. 하이데거의 우려처럼, 신도시의 수거 공간은 주거로서의 성스러움이 사라졌다.
또한 운정은 한때 공급 과잉으로 미분양 문제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고등학교 같은 교육 시설이나 충분한 상업 시설이 부족해 자족 기반이 미약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단기간에 많은 것이 채워지면서 일시적인 상권 불안정이나, 내가 겪는 것처럼 대중교통 인프라가 아직 완벽하지 않아 생기는 불편함도 분명히 존재한다. 잦은 지연과 긴 배차 간격은 신도시의 편리함 이면에 숨겨진, 미처 해결되지 못한 숙제 같은 거다.
30여 년 전, 초라했지만 자연의 숨결을 품었던 운정역은 이제 나름 성공적인 2기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허무하다. 자정이 넘은 시각, 막차를 타고 운정역에 도착하면, 입주를 앞둔 오피스텔 앞에 서면 경험한 적도 없는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