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책으로 된 성벽, 신림 '엉금서점' 방문기

by 꿈꾸는 곰돌이

고요한 책으로 된 성벽, 신림 '엉금서점' 방문기


신림동은 내게 늘 고시원과 자취촌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로 가득 차 있던 곳이었다. 빽빽이 들어선 빌라와 저층 건물들 사이에서, 저렴한 물가와 2호선이라는 교통의 요충지 외에는 특별한 매력을 찾기 어려웠던 평범한 주거 공간이었다. 그런 도시 한복판에, 책이라는 벽돌로 성채를 쌓은 특별한 장소가 있었으니, 이름부터 정겹고 느릿한 '엉금서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찾아갔다.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도시의 소음은 마치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예상대로, 가장 먼저 반긴 건 서점 이름 그대로 '엉금엉금' 느릿하게 움직이는 실제 거북이들이었다. 커다란 사육장 안에서 바위 위에 여유롭게 앉아 쉬는 거북이들의 모습은, 분주하게 돌아가는 신림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했다. 곳곳에 놓인 거북이 모양의 굿즈들은 이 서점의 고유한 특징이었다. 고요한 거북이처럼 책을 읽을 수 있는 이곳은 바쁜 도시 한복판의 고요한 성채 같았다. 대형 중고서점의 번잡함과는 달리,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개성을 간직한 독립서점만의 아늑한 분위기가 온몸을 감싸는 순간이었다.

책꽂이를 천천히 둘러보던 중, 빛바랜 책등 사이에서 80년대 운동권 청년들이 열정적으로 읽었을 법한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을 발견했다. 굳건한 신념과 뜨거운 열정으로 시대를 고민하던 이들의 흔적이 책장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듯했다. 그 옆으로는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같은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인문학 책들이 고즈넉이 놓여 있었다. 낡은 종이 냄새와 함께 밀려오는 책의 무게감은 지식의 성벽 안에 들어선 듯한 특별한 기분을 선사했다. 책 한 권 한 권이 벽돌이 되어 쌓인 이 성벽은 외부의 소음과 시간을 차단한 채, 나를 깊은 사유의 공간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시간의 흔적과 깊은 사유가 담긴 책들 사이에서,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서울의 한 자취촌, 치열한 삶의 현장인 신림동의 작은 독립서점에서 한 세기 전 혁명가의 글을 읽는 순간은 묘한 대비를 이루며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책의 성벽 속, 고요함 속에 잠겨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사육장의 거북이가 떠올랐다. 느릿한 움직임과 어우러져, 활자 속 과거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디지털로는 재현할 수 없는 낭만의 아우라를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엉금서점은 책만 파는 대형 서점과 달리,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와 도시를 성찰할 수 있는 고요한 사유의 공간이었다. 귀여운 거북이들이 건네는 느릿한 위로와 책 속에 스며든 시대의 목소리가 공존하는 이곳은 앞으로도 신림동을 지키는 소중한 아지트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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