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화된 감수성: 퍼포남 현상에 관하여
자본주의 사회는 뭐든 이름표 붙이고, 분류하고, 어떻게든 특정 프레임에 가두려는 이상한 강박에 사로잡힌 것 같다. 만물 상품화하는 체제니까 당연하다. 그중에서도 인터넷 '밈' 문화가 이런 분류는 이런 현상을 잘 반영한다. 최근 Z세대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퍼포남'이란 용어도 이런 분류 욕망의 산물이다. 셔츠에 토트백 메고, 줄 이어폰으로 남들 잘 안 듣는 감성 음악 틀어놓고, 섬세한 감성 뽐내는 남자들. 거기다 자기계발서 대신 철학책이나 문학책 파고들고 진보적 가치관까지 갖춘 이들을 이 프레임은 한데 묶어버린다. 그리고 이들에게 "여성 시선 의식한 퍼포먼스"라는 낙인을 찍는 행위가 과연 타당한 걸까? 아니면, 이 안에 어떤 진실과 왜곡이 뒤섞여 있는 걸까?
'퍼포남'이란 프레임의 등장은 그저 특정 유형 남성을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 젠더 지형 변화를 읽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는 전통적 남성성, 그러니까 이른바 '상남자'로 대변되는 마초적 이미지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적 시각이 단단히 자리 잡은 사회적 배경에서 태어났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퍼포남의 등장을 기존 남성성의 해체를 시도하는 긍정적 현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구닥다리 남성성, 공격적인 남성성이 더는 사회적으로 통하기 힘든 환경에서, 일부 남자들이 자신을 '무해한 남성' 또는 '젠더 감수성 높은 남성'으로 포지셔닝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으니까. 이건 전통적 남성성에 대한 자기 검열의 결과일 수도, 페미니즘적 가치를 내면화하려는 노력일 수도, 아니면 사회적 비난에서 자신을 방어하고 여성들에게 긍정적 평가를 얻고 싶은 욕망의 반영일 수도 있다. 실제로 기존의 마초적 취향 대신 여성 시선을 고려한 '퍼포남'의 등장을 페미니즘적 진보로 해석하는 시선이 틀린 것은 아니다.
'여성 시선을 의식한 퍼포먼스'라는 지적은 이런 젠더 역할 재구성 과정에서 나타나는 남성들의 '불안감'과 '인정 욕구'를 드러낸다. 한마디로, 여성의 시선을 인식한 남성들의 새로운 인정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퍼포남'이란 프레임 자체가 젠더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본질적 노력이 아닌, 또 다른 '성 역할 강요'의 형태가 될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도 무시할 수 없다. 무해한 남성성을 연기하는 행위가 진정한 성찰을 통한 젠더 평등 실현보다는, 특정 이미지로 소비되거나 심지어 비판 대상이 되면서 또 다른 방식의 남성성을 획일화하려는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거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무해한 남성성'을 운운하며 '퍼포남'이 되길 요구하는 역설적 상황은, 결국 젠더 담론이 이상적 남성상을 제시하고 그에 맞출 것을 요구하는 또 다른 프레임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결국 '마초남'의 정반대일 뿐, '퍼포남'은 남성상이란 근본적 프레임 자체를 깨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결국 ‘퍼포남’이라는 라벨은 이처럼 섬세한 남성적 표현과 주체적인 삶의 방식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만적인 행위로 폄훼하는 위험한 기미를 내포한다. 물론 이 시대의 소비 행태가 정체성의 신호이자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헤겔의 주객동일화처럼, 개인의 취향은 그 사람의 편린이자 일부를 반영하며, 특정 아이템이나 취향이 '감수성 있는 남자'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프레임이 가진 이분법적인 사고에 있다. ‘진정한 나’와 ‘보여주기 위한 나’라는 형식적인 날카로운 경계를 긋고, 그 안에 개인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욱여넣으려는 시도 말이다. 특히 이 프레임은 비단 '보여주기 위한 행위'라는 낙인에 그치지 않고, 그 저열한 동기를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라 비하하는 유치함마저 보인다. 진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이 그리 단순하던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이 인간 본질의 일부임을 고려할 때, 우리는 과연 순수한 ‘내적 동기’만으로 이루어진 행위를 온전히 구분해낼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대상을 상품화하고, 프레임을 만들어 그 속에서 인간을 소비 가능한 유형으로 분류한다. 이러한 프레임화는 곧 대상화로 이어진다. '퍼포남'이라는 프레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개개인의 취향과 정체성이 ‘보여주기’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평가절하되는 것은 깊은 성찰과 다층적인 의미를 잃게 만든다. '상남자'라는 규격화된 폭력에 이어 '퍼포남'이라는 새로운 규정은 결국 자유로운 개성의 발현을 억압할 따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이미지나 성 역할을 강요하는 프레임이 아니라, 그 어떤 프레임에도 갇히지 않는 다채롭고 주체적인 자기표현의 자유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러한 자유를 억압하며 형식적 편리를 위해 개인을 프레임화하고 대상화한다. 우리가 이러한 프레임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만의 '가오'를 지킬 때, 비로소 시대가 요구하는 형식적 편리를 넘어서는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