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가한 보이지 않는 구타

400번의 구타

by 꿈꾸는 곰돌이

<400번의 구타>: 사회가 가한 보이지 않는 구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명작, <400번의 구타>를 떠올리면, 누벨바그의 선두주자답게 작가적 개성과 시적인 미장센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불우한 소년 앙투안 두아넬의 성장기를 담담하게 따라가던 카메라는, 원심력을 활용한 역동적인 장면 연출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폭발하는 결말에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익숙한 ‘자유’와 ‘심리적 성장’이라는 틀을 넘어, 철저하게 유물론의 시선에서 이 영화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이런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한 인간의 삶이 어떠한 물질적 기반 위에서 비극적으로 짜여지고, 그 과정 속에서 ‘문제적 개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가늠하게 된다.

앙투안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단지 어린 소년의 일탈이나 자유에 대한 막연한 동경 이상으로, 거대한 보이지 않는 벽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유물론적 시선에서 그의 불행은 성격적 결함이나 연속된 불운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 사회를 관통하던 냉혹한 물질적 토대와 견고한 계급질서, 그리고 이를 집요하게 고정시키는 제도적 힘에 의해 짓눌린 결과이다. 앙투안의 방황은, 어쩌면 처음부터 가족과 학교라는 두 제도 안에서 운명처럼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먼저 앙투안이 맞닥뜨리는 견고한 장벽은 ‘가정’이라는 이름의 현실이다. 좁고 어두운 단칸방, 현관과 방 사이의 틈에 몸을 말아넣고 잠드는 앙투안의 모습은, 가족의 빈곤이 어떻게 한 소년의 살과 마음에 깊은 흉터로 새겨지는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부모가 앙투안을 딱히 돌보지 못하는 건 미움이나 무관심 때문이 아니다. 불안정한 수입과 고된 노동 끝에 체력과 정서적 여유마저 고갈되어버린, 지나치게 현실적인 비극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정보다 통제가 앞서는" 어머니의 태도 역시, 사회가 바라는 ‘모범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통제의 논리가 가족이라는 가장 사적인 울타리 안으로 스며든 한 풍경이다. 누군가는 어머니의 도덕적 결함을 비난하며 현모양처의 필요성을 외치겠지만, 오히려 경제적 기반이 어떻게 개인의 생각과 가족문화를 형성하고 재생산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결국 영화는, 노동계급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왜 비뚤어질 수밖에 없는지, 가능성 수준이 아니라 운명처럼 그려낸다.


앙투안을 꽁꽁 옭아맨 또 하나의 강력한 제도, 바로 ‘학교’다. 학교는 망설임도 없이 앙투안을 ‘문제아’로 규정한다. 제도라는 이름 아래, 표준화된 규칙과 질서에 아이들을 억지로 끼워맞추는 국가교육의 강압적 속살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톡톡 튀는 기질이나 호기심, 창의력은 시험 점수나 순종적인 태도보다 훨씬 하찮게 취급된다. 앙투안이 발자크의 문장을 인용해 숙제를 냈다가 표절로 몰려 수치심을 겪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어린 나이에 발자크를 이해하고 감탄하는 재능과 호기심조차, 권위를 쥔 교육자와 형식적인 기준 앞에선 무참히 짓밟힌다. 이런 학교야말로 특정 계급의 문화를 절대화하고, 주류에 맞지 않는 아이들은 가차 없이 배제하면서 기존 질서를 반듯하게 다지는 통제기구로 기능하고 있다.

영화 <400번의 구타>는 그래서 한 소년의 비극적인 성장담이자, 사회가 만들어낸 거대한 틀 속에 포획된 아이들의 외로운 분투기를 담고 있다. 앙투안의 삶을 에워싼 견고한 구조는 그를 끊임없이 통제하고, 결국 끝없이 자유를 향해 달리게 만든다. 그의 고독하고 쓸쓸한 뒷모습은,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앙투안들의 또렷한 그림자처럼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앙투안이 연이어 일으키는 일탈 행위 역시 그의 물질적 결핍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우유를 훔치거나, 돈이 부족해 아버지 사무실에서 타자기를 슬쩍하려 한다. 이 장면들은 감독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런 행동들은 단순히 도덕성이 낮아서가 아니다. 최소한의 생존 자원조차 손에 넣기 어려운 사회 구조 때문에, 개인이 범죄에 내몰리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의 비행은 단순한 탈선이 아니라, 계급 문제가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앙투안이 아버지에게 경찰에 넘겨지고, 결국 소년원에 수감되는 과정에서는 국가의 폭력적인 억압 기제가 여실히 드러난다. 절도 조서를 쓰자마자 소년원에 보내지고, 문제아들만 골라 보호 관찰소에 격리하는 일련의 절차는 국가가 ‘교정’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일탈을 억압하고 통제해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충분히 훈방으로 끝날 수 있었던 작은 사건조차, 관료적인 경찰과 무관심한 부모가 맞물리며, 앙투안은 지옥 같은 소년원에 내던져진다. 이는 한 아이의 자유를 철저히 빼앗을 뿐 아니라, 계급 재생산과 국가 폭력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앙투안이 "진실을 말해도 부모님이 믿어주지 않으니 결국 거짓말을 하게 됐다"고 토로하는 장면에서는,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마저 돈과 권력의 논리로 쉽게 오염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쓸쓸한 현실이다.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앙투안은 소년원을 뛰쳐나와 바닷가를 향해 끝없이 달린다. 그리고 바다를 마주한 채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롱테이크 장면에서는 언뜻 자유에 대한 희망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유물론적으로 바라보면, 이 '자유'는 실상 든든한 기반 없는 막막한 도피에 가깝다. 그래서 더욱 쓸쓸하다. 바다는 새로운 시작의 공간처럼도 보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품어주지 않는 텅 빈 미래이자, 미지의 영역이기도 하다. 앙투안의 외로운 눈빛, 그리고 그를 둘러싼 벽이 여전히 두껍게 존재하는 현실, 사회 구조라는 사슬이 앞으로도 쉽게 풀리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쓸쓸함이, 마치 바다 위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차갑게 다가온다. 결국, 앙투안은 스스로의 의지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구조적 한계 앞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고, 이런 모습은 그의 비극적인 삶이 물질적 현실 위에 깊게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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