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반자본주의로서의 횔덜린의 광기
-조르주 아감벤, 《횔덜린의 광기》, 현대문학, 2025
횔덜린이라는 이름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글을 통해 처음 각인되었다. '인간은 대지 위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그의 숭고한 문장으로 천재 시인의 존재를 알렸지만, 동시에 하이데거라는 대륙 철학의 거인이 남긴 그림자 때문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왠지 모르게 극우적이고 목가주의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의 광기는 흔한 예술가의 광기 정도로만 생각해 그동안 그의 사상을 깊이 탐구하는 것을 주저해왔다. 물론, 그의 '생의 절반', ' 빵과 포도주', '라인 강'등 그가 남긴 시와 유일한 소설인 '휘페리온'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의 모든 시를 깊게 탐독한 것은 아니지라, 단지 독일 낭만주의 시인으로만 그를 이해했다. 그것도 반문명적이고, 고대 희랍을 무척 좋아하는 전형적인 낭만주의자로 말이다.
그러나 조르조 아감벤의 『횔덜린의 광기』를 읽으면서, 횔덜린에 대한 시선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 책은 한 천재 시인의 광기를 단순한 정신병으로 해부하는 것을 넘어, 그의 광기가 우리 시대와 인간 존재에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을 지극히 진보적인 시각으로 해석해낸다. 하이데거가 그려낸 횔덜린의 이미지와 달리, 아감벤은 횔덜린에게서 '소유'와 '자본'에 저항하는 급진적 가능성을 읽어낸다. 심지어 동시대의 거인 괴테와 횔덜린을 비교하며, 괴테가 균형 잡힌 근대적 개인의 초상이라면 횔덜린은 그 경계를 넘어서려 했던 불안하고 숭고한 영혼으로 그려내는 방식 또한 흥미롭다.
우선, 저자인 조르주 아감벤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의 사유는 늘 흥미로운 것 같다. <불과 글>외에는 원저작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칼 슈미트의 예외 상태 개념을 가져와 현대의 호모 사케르를 풀어내거나 코로나 사태 때 마스크 착용 반대하는 것을 보면, 그의 매력적인 사유를 알 수 있다.
그의 저작 <횔덜린의 광기>는 횔덜린이라는 잊혀진 예언자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광기 속에서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뼈아픈 비판과, 잃어버린 '진정한 거주'의 의미를 다시금 숙고하게 만들었다. 이 시적인 반자본주의자의 삶이 이토록 깊은 울림을 줄지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문학사의 은둔자에서 시대의 예언자로: 횔덜린의 자리
문학사에서 횔덜린의 위상은 독특하다. 그는 당대 주류 문학계의 변방에서 외로이 시를 썼고, 생전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마르틴 하이데거가 그의 시와 철학적 깊이를 발굴하면서, 횔덜린은 비로소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특히 그의 선언, "인간은 대지 위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인용하며, 그의 사상을 존재론적 탐구의 중요한 시작점으로 삼았다.
물론, 하이데거와의 연관 때문에 횔덜린을 극우적 민족주의 시인으로 오해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그의 사상에 대한 지극히 편협한 해석일 뿐이다. 횔덜린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은 고대 그리스의 이상이었다. 그것은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우월성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 신성함과의 교감, 그리고 인간 본연의 숭고함이 살아 숨 쉬던 목가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는 분열되고 파편화된 근대 속에서 잃어버린 ‘총체적 삶의 양식’을 추구했던 비운의 시인이었으며, 그의 광기는 이러한 지고한 이상을 담아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민감한 영혼의 격렬한 반응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방식: '거주'와 반자본주의적 삶
아감벤은 횔덜린의 '시적인 거주' 개념을 인반적인 삶의 방식이 아닌, 세계와 관계 맺는 '비소유적인 삶의 방식'으로 통찰한다. 이 지점에서 횔덜린은 트럼프식 '정복'이나 파시즘의 '파멸'과 같은 지배 논리에 정면으로 맞서는, 말 그대로 반자본주의자의 가치를 대변한다고 느꼈다. 그들에게는 소유와 통제, 확장이 미덕이었지만, 횔덜린에게는 세계에 대한 개방과 경청, 그리고 취약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진정한 거주의 방식이었다.
물론 이러한 삶의 태도는 횔덜린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20세기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주장한 '존재 방식'은 횔덜린의 거주 개념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프롬은 인간이 소유물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소유 양식'을 넘어, 살아있는 경험과 세계와의 능동적인 관계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 '존재 양식'을 제안했다. 횔덜린의 '시적인 거주'야말로 바로 이러한 '존재 양식'의 원형을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횔덜린의 광기는 넘어선다. 그의 광기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소유 양식'에 대한 영혼의 처절한 저항으로 읽힌다. 사물화되느니, 차리리 미쳐버리겠다는 벗이다. 자본이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인간마저 소외시키는 근대의 초기, 횔덜린처럼 순수하게 '존재'하려 했던 영혼은 광기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광기와 광기로 창작한 말년의 시는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효율성의 굴레 속에서 자신의 본질적 존재 방식을 상실한 문명인들에게 보낸 오래된 유서 같다 횔덜린의 광기 속에서, 소유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시대의 병폐를 고스란히 포착할 수 있다.
3즈의 상실, 광기의 탄생: 디오티마와 단테의 베아트리체
인간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삶에서 수제트 곤타르트-불후의 소설 《휘페리온》에서 '디오티마'라고 불리는 여인-는그의 영원한 뮤즈다. 횔덜린의 시적 영혼을 지탱하는 플라토닉한 사랑은 그의 시 세계에 지고한 아름다움과 열정을 불어넣었다. 이는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통해 신성한 사랑과 구원의 길을 찾았던 것과 표면적으로는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신의 은총으로 인도하는 완벽한 중개자였으며, 그녀의 존재는 단테를 『신곡』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구원으로 이끌었다. 즉,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신앙과 예술적 완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했다. 반면 횔덜린에게 디오티마는 잃어버린 그리스적 조화와 신성함에 대한 이상을 구현하는 존재였다. 그녀는 횔덜린이 갈망했던, 물질적 소유와는 무관한 '순수한 거주'를 현실에서 가능하게 하는 연결 고리였다.
이 지점에서 디오티마의 죽음은 횔덜린에게 단순한 이별을 넘어섰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간절히 염원했던, 세계와의 근원적인 연결, 즉 '비소유적 거주'를 가능하게 했던 핵심적 고리의 상실을 의미했다. 현실 세계가 더 이상 그의 '시적인 거주'를 감당하거나 지탱해 줄 수 없었을 때, 그의 정신은 무너져 내렸다. 디오티마의 죽음은 횔덜린이 갈망했던 이상적 세계가 외부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을 상징하며, 그의 광기는 그 이상을 외부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오직 광기 속에서만 지속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로 해석된다. 광기는 그에게 현실의 폭력과 이상과의 불화에 대한 민감한 정신의 극한 반응이자, 무자비한 자본주의적 현실 속에서 '존재 양식'을 지켜내려는 최후의 방벽이었던 셈이다.
휘페리온과 벤야민의 '정지 상태의 변증법'
횔덜린의 서간체 소설 『휘페리온』은 그가 추구했던 그리스적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주인공 휘페리온의 방랑과 고뇌는 잃어버린 고대 그리스의 이상과 그 조화를 되찾고자 하는 횔덜린 자신의 갈망을 대변한다. 여기서 '시적인 거주'는 단순히 이상향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소유 욕망에 물들지 않은 과거의 순수하고 조화로운 세계와의 '재접속'을 통해 현재를 살아내려는 강렬한 의지다.
조르주 아감벤은 횔덜린의 '거주' 개념에서 발터 벤야민의 '정지 상태의 변증법'을 소환한다. 벤야민은 헤겔처럼 역사를 선형적인 진보로 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특정 역사적 순간을 '정지'시켜 그 안에 응축된 과거의 해방적 잠재력이나 억압된 진실을 폭로하려 했다. 헤겔이 대립하는 개념들을 종합하여 해결하려 했다면, 벤야민은 이들을 정지된 상태로 병치(並置)시켜 새로운 통찰을 얻으려 했다. 횔덜린의 '시적인 거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본이 지배하는 근대의 분열과 파괴 속에서 이상적인 그리스적 정신을 '정지'시키고, 그것을 현재에 소환함으로써 진정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려 한다. 그의 시와 철학은 마치 역사의 파편 속에서 빛나는 '별자리'처럼, 흩어진 조각들 사이에서 의미와 통일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그의 '광기' 또한 세계의 합리적 질서(즉 자본주의적 질서)를 거부하고, 벤야민의 '정지된 이미지'처럼 역설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폭로하려는 '정지'의 한 형태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정신적 붕괴가 아니라, 소유와 이윤만을 좇는 사회에 대한 철저한 거부이자,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한 고독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조르주 아감벤의 『횔덜린의 광기』는 그의 광기와 '시적인 거주' 개념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과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동 시대 천재 중 괴테가 쓴 성숙기를 보여주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가 현대 문명의 전범이라면, 횔덜린의 시는 근대 초기 시절 쓰여진 가장 주목할 만한 반문명의 전범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디오니게스부터 시작해 쇼펜하우어, 니체, 하이데거 등 반헤겔주의적 문명의 대가들이 있지만, 근대 초기에서 광기라는 삶의 방식으로 은둔하며 존재의 시원을 회복하려는 무의식적 태도로 보인다. 횔덜린의 광기가 역설적으로 그의 가장 예리한 통찰을 담고 있음을 깨달았으며,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비소유적 존재 양식'의 중요성을 다시금 절감했다. 횔덜린은 진정 시대를 앞서간 시적인 반자본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