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안꾸' 미학의 역설
주말 오후, 합정부터 홍대입구를 지나 연남동으로 이어지는 길, 삼삼오오 모여 브런치를 즐기는 이른바 '느좋' 카페 풍경을 상상해 보라. 흰 티셔츠에 핏 좋은 청바지, 살짝 루즈한 가디건을 걸치고 마치 방금 침대에서 일어난 듯 자연스럽게 질끈 묶은 머리. 언뜻 보기에는 꾸민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티셔츠는 평범해 보이지만 소재가 남다르고, 청바지는 군더더기 없이 몸에 감기며, 손에 든 미니백은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이다. '대충' 묶은 머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잔머리조차 계산된 우아함을 풍긴다.
바로 이것이 현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미적 코드인 '꾸안꾸', 즉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운 스타일'의 전형이다. 진보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진보한 풍경으로 보인다. 값비싼 명품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니 경제적으로 평등한 패션 미학이라는 점에서 재단하면 말이다. 패션과 정치를 동일화하는 오류를 피해야겠지만, 결코 분리할 수는 없다. 히피가 명품으로 도배한 부르주아보다는 진보적이니 말이다. 그러나 꾸안꾸의 진보성을 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꾸안꾸라고 프레임화되는 순간, 자본의 마수에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무심하고 편안한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듯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꾸안꾸'는 오히려 끊임없이 자신을 꾸미고 관리해야 하는 강렬한 압력, 즉 꽤나 고도화된 꾸밈의 역설이다. 이 대목에서 조르주 아감벤의 '예외상태' 개념을 가져와 보자. 물론 그가 이야기했던 예외상태는 지배 계급의 통치 전략이라 할 수 있지만, 과거 댄디즘이 특정 계급의 '예외적인' 예술적 실천이었다면, '꾸안꾸'는 '예외상태의 정상화'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일상적 의무가 되었다는 점에서 날카로운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현대 한국 사회의 '꾸안꾸'는 과거에는 '예외상태'였던 꾸밈의 행위를 '정상화'시켜 버렸다. 과거에는 파티나 중요한 모임처럼 특별한 상황에서만 '꾸밈'이 허용되거나 요구되었다면, SNS를 통해 일상이 끊임없이 전시되고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순간이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 한병철의 개념을 빌리자면, '투명사'회에 스스로를 전시해야 하는 패션 트렌드라고 할 만하다. 이에 따라 '꾸미지 않은 듯 꾸민' 모습이 일상적인 디폴트 값, 즉 기본값이 된 것이다. 이는 사회적 인정과 자기 가치화를 위해 '꾸밈'이 이제는 '특별한 상태'가 아닌 '정상 상태'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예외상태의 정상화' 속에서 '꾸안꾸'는 진정한 자연스러움이 아닌, 고도의 계산과 노력이 숨겨진 '꾸밈 노동'으로 기능한다. 그 구체적인 예시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노동의 강도가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패션에서 '꾸안꾸'는 종종 고급스러운 기본 아이템의 조합으로 표현된다. 마치 옷장에서 아무거나 집어 입은 듯 보이지만, 완벽한 핏의 캐시미어 니트, 부드러운 고급 면 티셔츠, 색감 좋고 핏이 예쁜 데님 팬츠는 상당한 구매 비용을 요구하며, 심지어 개인의 몸에 맞춰 수선하는 과정까지 수반된다. 그런지룩만 보더라도 괜찮은 정장보다 훨씬 어렵다. 이는 "나는 편안함을 추구하지만, 그 안에서도 결코 품격을 잃지 않아"라는 계산된 자본의 과시가 된다. 또 '무심한' 오버핏 재킷이나 셔츠는 어깨선이나 품, 소매 길이가 모두 의도적으로 디자인된 것이며, 자신의 체형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제품을 찾아내기 위한 상당한 탐색과 노력이 필요하다. 현대 꾸안꾸 패션을 상징하는 기표로 커트 코베인을 언급하고 싶다. 물론 지난 세기 사람이지만, 그런지룩이라고 하는 포스트모던화된 히피의 전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분명 안 꾸민 것처럼 보이나, 자칫했다가는 정말로 안 꾸민 것처럼 보이는 위험도 존재한다.
헤어스타일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듯한 웨이브나 풍성한 볼륨은 '타고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미용실에서 몇 시간을 공들여야 얻을 수 있는 펌 시술의 결과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히피펌, 쉐도우펌, 볼륨 매직 등 머릿결 손상을 야기하는 시술이 필수적이다. 찰랑거리는 윤기 있는 생머리 또한 꾸준한 트리트먼트와 제품 사용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대충 묶은' 듯한 헤어스타일 역시, 잔머리의 양, 묶는 높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옆머리 라인, 심지어 사용하는 헤어밴드까지 모든 것이 세심하게 계산된 고도의 대충인 것이다.
이렇듯 '꾸안꾸'는 자연스러움이라는 이상적인 가치를 내세워, 사실은 끝없는 비교와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적 압력을 은폐한다. 이는 외모 관리에 투입되는 시간, 자본, 그리고 심리적 에너지를 폭증시키며, '자연스러움'을 상품화하여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한다. 과거의 꾸밈이 특별한 이벤트에 국한된 예외적 행위였다면, '꾸안꾸' 미학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일상 모든 순간이 타인의 평가에 노출되는 무대가 되면서, '꾸밈 노동'이 필수적인 의무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러한 '꾸밈 노동'은 개인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외모 관리와 자기 연출에서 찾도록 유도하며, 진정한 '나'의 모습보다는 사회가 원하는 '이상적인 나'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도록 만드는 역설적인 현상을 낳는다. '꾸안꾸'는 결코 해방적이지 않다. 오히려 더 교묘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우리의 시간과 노동, 그리고 자본을 착취하며, '예외상태의 정상화'라는 이름 아래 우리 모두를 거대한 '꾸밈 노동'의 장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는 단순한 패션 트렌드를 넘어,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미학과 '자기 관리' 강박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적 징후로서 날카로운 비판적 성찰을 요구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꾸안꾸’가 불러오는 자본의 압박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아무렇게나 꾸민 듯, 실은 철저히 계산된’ 그 얼굴 뒤에는, 외모만으로 사회적 가치를 매기고 통제하려는 현대 자본주의의 교묘한 덫이 숨어 있다. 진짜 아름다움과 개성은, 결국 자본이 짜두른 유행의 틀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자기 삶의 결정권을 되찾는 데서 피어난다. 이제 우리 모두 ‘꾸밈’이라는 강박에서 조금씩 물러나, 내 몸과 마음이 편할 수 있는 참된 자유를 찾아가야 할 때다.
그러나 비관적이게도 만약 꾸안꾸에 맞선 새로운 패션 스타일이 도래하면 그것도 당연히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다. 특정 스타일을 프레임화하는 방식은 소비 사회가 지속되는 한 영원할 것이다. 개인의 의지와 달리, 이 자본이 그렇게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해방된 패션 추구는 우리가 후기 자본주의를 극복하고나서야 입에 올릴 수 있다는 무책임한 진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