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레놀 사회: 고통을 사물화하는 자본의 알약
트럼프 행정부가 가임기 여성의 타이레놀 복용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며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전문가들의 엄청난 비판을 받은 이 주장은 분명 근거가 미약하다. FDA, WHO 등 많은 단체에서 반박하는 의견을 냈다. 확실히 연구 기관이 아닌 행정부가 이런 주장을 하는 배경에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다. 트럼프 특유의 정치적 쇼로, 자폐증 치료제인 '류코보린'을 홍보하려는 기획으로 보인다. 부정선거 주장 등 반지성주의적 음모론을 일삼는 트럼라 솔직히 그닥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주장이 보여준 파급력이다. '일개 진통제 하나에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음모론적인) 주장에 최대 타이레놀 소비국인 미국은 물론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전문가들은 '근거가 미약하며, 최대 복용량만 지킨다면 안전하다'고 일축했지만, 여파로 주가가 하락하는 등 타이레놀의 상징성과 파급력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현대인의 가정에 상비약으로 자리 잡은 타이레놀은 이제 단순한 진통제를 넘어 현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강력한 기표가 된 것이다.
인류는 고대부터 고통을 줄이고자 하는 오랜 염원을 진통제에 담아왔다. 수술이나 출산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을 막기 위해 사용되던 근대 이전의 진통제와 달리, 현대의 진통제는 일상적으로, 그리고 상시적으로 사용된다. 대표적인 타이레놀만 보더라도 간독성 외에는 뚜렷한 부작용이 거의 없어 최대 용량만 지키면 안전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렇기에 현대인은 무의식적으로 타이레놀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타이레놀은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기보다는 약화하고 감소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인위적인 고통의 감소는 의학적 부작용이 없거나 적다고 해도 인간 경험의 총체를 훼손할 수 있다. 고통은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으면서 우리는 건강함의 소중함을 깨닫거나, 고통 속에서 숨 쉬는 법을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고통을 단순히 부정적인 것으로만 간주하며 제거하려 한다. 가장 큰 이유는 고통을 겪는 주체는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냉혹한 자본의 논리 때문인 것이다.
한병철이 역저 『피로 사회』에서 지적했듯이, 현대인은 성과 지향적이고 끊임없는 자기 착취를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내면의 소진과 피로에 시달린다. 이러한 피로와 고통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끊임없는 생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이 이중성을 은폐하고 시스템을 지속시키는 주요 수단으로 나는 진통제와 각성제 두 가지 성분을 꼽고 싶다. 그중 타이레놀은 가장 보편적이고 친숙한 진통제로서, 우리의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잠시 마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는 고통을 단순히 제거하는 것을 넘어, 고통의 경험 자체를 '사물화'하여 소비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파란 알약'처럼, 타이레놀은 개인의 고통이 생산성 저하로 이어져 자본의 순환을 방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자본주의 이윤 생산의 슬픈 알약이다.
자본은 노동의 주체가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노동하고 소비하며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한다. 타이레놀은 바로 이 고통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두통, 근육통, 생리통 등 다양한 고통의 순간에 우리는 이 작은 알약을 삼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이 알약은 개인이 느끼는 근원적인 고통이나 사회적 모순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기보다는, 고통을 경감시켜 일시적인 진통에 불과하다. 이는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증상만을 제거하여 현상 유지를 돕는 기만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의 첨단에 서 있는 미국 사회에 타이레놀만큼 그 병폐와 모순을 진단하는 기표는 없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의료 민영화가 고도로 진행된 미국에서는 병원 진료비와 약값이 천문학적 수준이다. 가벼운 증상에도 값비싼 의료 서비스를 감당하기 어려운 다수의 시민은 병원에 가는 대신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이레놀에 의존하게 된다. 고통을 호소할 때조차 경제적 계급에 따라 접근할 수 있는 치료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몸과 고통마저도 상품화하고 계층화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통을 감수하며 타이레놀로 버티는 행위는 아픈 몸을 달래는 것을 넘어, 의료 시스템의 불평등과 그로 인한 사회적 고통을 침묵하게 만든다. 타이레놀은 이처럼 고통을 은폐하고 침묵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스템을 더욱 견고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즉, 일상화된 타이레놀 복용은 중독 및 간독성과 같은 신체적 병폐뿐만 아니라 사회적 병폐로 이어진다. 근본적으로 인후통, 두통, 생리통 같은 각종 통증에는 타이레놀이 아닌 쉼으로 치유해야 하나, 자좁주의는 휴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과연 타이레놀을 통해 우리의 고통이 진정으로 해소되고 있는 것일까? 아님 단지 자본의 효율성을 위한 도구로 소비되고 있는 것일까? 이 작은 알약 속에는 고통으로 숨 쉬는 법을 가르치기보다, 고통 자체를 제거하려 드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잔혹한 원리가 담겨 있다는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