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폐 캠핑족 논란: 시적 거주가 불가능한 시대

by 꿈꾸는 곰돌이

민폐 캠핑족 논란: 시적 거주가 불가능한 시대


‘민폐 캠핑족’과 관한 논란은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다. 산이나 숲, 혹은 바다, 강, 호수 등 흔히 말하는 자연이 있는 곳에서 텐트를 설치하고 음주가무를 벌이며 쓰레기를 무단투기하는 그들의 행태는 도시인의 야만을 잘 보여준다. 타인에 대한 민폐를 넘어, 인간을 품는 자연 그 자체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비판의 대상이다. 사실 캠핑족 문제는 2010년대 이후 아웃도어 활동의 확산과 궤를 같이하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제는 이를 몇몇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캠핑’이라는 행위 이면에 깔린 근원적인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대개 캠핑을 즐기거나 자연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목가적, 낭만적 성향을 띠며, 물질 문명을 등지고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것처럼 비치기 마련이다. 캠핑은 분명 현대 도시인에게 자연을 체험할 몇 안 되는 통로를 제공한다. 수많은 도시인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숲과 잔잔한 물결, 밤하늘의 별을 찬미하며 진정한 힐링과 교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의 발자국 뒤에는 버려진 쓰레기, 고성방가로 깨진 정적, 타인의 휴식을 방해하는 민폐 행위들이 처참한 흔적으로 남겨지곤 한다.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연에 해를 끼치고 불편함을 초래하는 이 풍경은 이들이 자연에서 ‘거주’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정복’하러 온 것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현대 자본주의 도시의 생활방식이 깊이 체화된 현대인에게는, 자연 속에 있다 한들 그 경이로움을 온전히 느끼며 공존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탓이다.


'시인 중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인간이 단지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적으로 거주하는 존재'임을 알았다. 그의 시구처럼 "인간은 이 땅 위에 시적으로 거주한다." (Der Mensch wohnt dichterisch auf dieser Erde.) 횔덜린의 거주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사는 것을 넘어, 세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정신적이고 성스러운 행위의 총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적 사고와 자본주의적 사유 방식은 이 성스러움을 앗아갔다. '거주' 대신 '정복'과 '소유'의 논리가 그 자리를 채운 것이다. 도시는 끊임없이 자연을 개발하고 재편하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자연은 더 이상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이용 가능한 도구, 혹은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자본주의적 삶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은 무의식중에 이러한 정복과 소비의 논리를 자연 속으로 그대로 가져간다. 캠핑 역시 자연을 대상화하여 소비하는 하나의 레저 활동으로 전락하고 만다.


횔덜린을 해석한 마르틴 하이데거가 '거주'를 성스러운 개념으로 보았듯, 자연에서 진정한 성스러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도시적 편의와 그 안에 깊이 박힌 자본주의적 사유 방식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러나 현대 캠핑족들은 자연 속에서도 도시의 편의를 포기하지 않으며, 텐트 안에 자신들만의 '작은 문명'을 구축하려 든다. 이는 자연과의 조화가 아닌, 철저히 자연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이자 자연을 도구로 여기는 자본주의적 시선의 연장선이다. 겉으로는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연을 인간 중심적인 방식으로 정복하고 소비하는 이 캠핑 행위는, 도시 생활에 체화된 현대인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내면에 자리 잡은 자본주의적 사유 방식이 희석되지 않는 한 진정한 거주도, 공존도 불가능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연을 사랑한다면, 먼저 자연을 사유하는 우리의 태도, 즉 깊이 뿌리내린 자본주의적 사고방식부터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삶의 모든 양상에 깊게 체화된 현대인에게 이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결국 자연에 거주하는 캠핑은 도시로부터의 일시적 도피, 혹은 소비적 유희에 그치고 만다는 비극적인 역설 앞에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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