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중립이라는 환상
최근 교사 신분으로 윤석열과 김건희를 비판하는 집회에 참여했던 백금렬 씨가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분노스럽게도 1심에서 유죄 판결이 나왔다는 점이다.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그리고 자격정지 1년이라는 중징계였다. 이런 식으로 비판의 목소리 자체가 범죄로 취급되고 무겁게 처벌받는 현실은, 우리 사회가 '정치적 중립'이라는 명분 아래 비판을 얼마나 억누르려 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판결은 다행히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광주지방법원 형사4부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백 교사의 행위가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하지 못했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특히 재판부는 중요한 지적을 내놓았다. 현대 국가에서는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영역의 문제들이 얼마든지 정치적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각 의견이 띠는 정치성의 강약만 다를 뿐, 일정 부분 '정치적 목적'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공무원 역시 개별 인격체로서 정치 활동의 자유가 있으며, 공직수행과 직접 관련이 없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영역에서는 가능한 한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명확히 밝혔다. 즉 백금렬 교사가 참여한 시위가 특정 정당의 지지나 반대가 아닌,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비판한 것이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파면 결정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면, 백금렬 씨의 발언이 어떤 판결을 받았을지 역시 불확실했을 것이다. 다행히 이번에 무죄로 끝난 백금렬 씨의 사례는 한국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환상을 드러낸다.
한국 사회는 ‘공인’이라는 이름을 단 사람들에게 특별한 침묵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연예인, 스포츠 스타, 인플루언서 등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들뿐 아니라, 국가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공무원들까지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입을 닫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율이 깔려 있다. 이런 ‘중립’은 마치 사회의 정상처럼 여겨진다. 이를 어기면 사회적 비난은 물론이고, 심할 경우 직업의 존립마저 위협받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12.3 계엄 당시 시민들을 지지했던 가수 이승환과 아이유 등 일부 연예인이 극우 세력에 의해 친중반미 세력으로 몰려 해외 정보기관에 신고당한 사례를 보면 그 분위기가 얼마나 노골적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식의 반동적 공격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암묵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중립’이라는 게 그렇게 순수하고 공정한 개념일까? 사실 이 기만적인 ‘정치적 중립’은 현 체제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이자, 대중의 비판적 시각과 저항 의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교묘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정치적 중립은, 결국 ‘현상 유지’라는 한 가지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분위기를 만들 뿐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은 결국 지배 계급의 이익을 반영한다. ‘정치적 중립’ 역시 이미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를 담고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따.
겉으로 볼 땐 아무런 의도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고 체제 비판의 목소리를 가라앉히려는 무의식적인 압력으로 작동한다. 공인이나 공무원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을 때, 그 침묵은 곧 기존 체제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로 읽힌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현실이 당연하다’는 그릇된 생각을 사회에 뿌리내리게 만든다.
이러한 '정치적 중립'의 환상이 현실에서 어떻게 기득권의 이해를 대변하는지는 백금렬 교사의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치적 중립'이 개인의 정당한 비판적 발언까지 봉쇄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법부의 중요한 경고이다. 재판부의 이러한 판단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중립'이라는 가면을 쓰고 개인의 비판적 사유를 억압하려는 시도에 대해 균열을 냈다.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게오르그 루카치의 개념을 빌려보면,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은 '사물화'된 이데올로기적 구호에 가깝다. 원래 인간의 주관적인 행위와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중립'이라는 개념은 마치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실체인 양 우리 앞에 뚝 떨어진다. 하지만 이는 착시일 뿐이다. '중립'을 요구하는 행위는 특정 상황에서 누군가에 의해 발화되고, 그 발화를 통해 특정 이해관계가 옹호되는 사회적 과정이다. 사물화된 '정치적 중립'은 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주체성을 인식하고 발휘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정치적 의제가 개인의 삶과 유리된, 그저 지켜봐야 할 '객관적 현상'처럼 여겨지게 만들며, 그 결과 우리는 현상 유지를 통해 이득을 보는 계급의 편에 서게 되는 아이러니에 빠진다. 백금렬 교사를 기소하고 1심에서 유죄를 선고했던 행위 자체가 바로 '정치적 중립'이라는 허울을 통해 사물화된 의식을 강요하고, 기득권의 이해를 수호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통찰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깨는 데 결정적인 일침을 가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불의가 질주하고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의 '기차' 안에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결국 그 기차가 향하는 방향, 즉 현상 유지를 묵인하는 비겁한 동의에 불과하다. 백금렬 교사의 시위 참여는 바로 이 "달리는 기차 위에서 중립은 없다"는 진실을 몸소 보여준 행동이었다. 그가 국정 운영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낸 것은, 무관심과 침묵을 통해 기득권의 안락함을 지키려는 시도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이자, '정치적 중립'이라는 환상이 개인의 양심을 억압하는 것을 거부한 주체적인 행위이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외피는 기득권이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무기이다. 정치적 중립이란 사물화된 의식을 통해 대중의 비판적 사유를 마비시키고, 마르크스가 갈파했던 계급적 지배를 강화하는 데 일조한다. 이 허망한 중립의 환상에서 벗어나, 우리는 달리는 기차의 방향을 물어야 할 때다. 만약 계속 폭주하는 기관차에 침묵한다면, 참사라는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계엄의 밤에서 대다수의 시민이 침묵을 지켰다면, 그 밤은 피로 얼룩졌을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