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사회: 제로 식품의 역설
최근 몇 년간 한국 식품 트렌드를 반영하는 기호가 있다면 '제로'일 것이다. 무첨가, 혹은 극미량 첨가를 의미하는 제로의 범람으로 기존에 과당이 들어간 음식 중 상당수에 '제로'라는 형제가 탄생했다. 설탕 없는 콜라와 사이다, 설탕 없는 소주, 카페인 없는 커피까지... '제로'라는 이름표가 붙은 상품들은 마치 현대 사회의 새로운 미덕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죄책감 없는 달콤함에 열광하고, 건강을 염려하며 제로 선택을 똑똑한 미덕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제로' 열풍이 과연 단순한 건강 트렌드일까? 그 이면에는 건강 관리라는 합리적인 포장지 속에 숨겨진, 복잡하고 때로는 기만적인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꿈틀거린다.
겉으로 제로의 열풍은 웰니스 열풍과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2010년대 후반부터 증가한 프렌차이즈 저가 카페에 유행한 어마어마한 고과당 음료가 유행하며 건강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이에 대한 반성으로 근 몇 년간 제로는 한국 사회를 뒤덮은 기호가 되었다. 제로의 이름이 붙은 음식들은 어찌보면 무결점의, 완벽한 대체로 보인다. 대체당으로 단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죄책감을 덜 수 있다는 점에서 '제로' 제품은 현대인의 복잡한 욕망을 정확히 꿰뚫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죄책감 없는 달콤함'이 사실은 허점이라는 점이다. '제로'를 소비하며 스스로 합리적이고 건강을 신경 쓰는 주체라고 착각하지만, 결국 이는 기업이 만들어낸 '덜어냄'이라는 가짜 만족감에 불과하다. 과소비로 인한 비만, 건강 악화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제로'라는 기호로 소비의 모순을 슬쩍 덮어버리는 기막힌 술책이다.
제로 식품은 분명 아도르노가 말한 허위의식을 심어준다. "나는 여전히 달콤함을 즐길 수 있지만, 건강도 챙기는 합리적이고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로 보면, '제로'는 주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호명하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장치라 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기 최적화'를 요구한다. 외모 관리, 운동, 그리고 식단까지, 모든 것이 통제되고 계산되어야 하는 자기 계발의 영역이 된 지 오래이다. '제로'는 이러한 사회적 압력 속에서 개인이 자기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는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하는 '성과 주체'임을 증명하는 상징적 행위가 된다. 단 것을 끊으라는 사회적 요구 앞에서 '제로' 콜라를 마시는 행위는 개인의 의지 박약을 해결하는 대신, 구조적인 모순을 봉합하고 개인의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고도로 구조화된 소비 체계 안에서 허락된 최소한의 일탈에 불과하다.
또한 '제로'는 역설적으로 '과잉'을 전제한다. 애초에 설탕을 비롯한 유해한 성분의 과잉이 없었다면 '제로' 제품은 등장할 이유가 없다. 자본은 늘 그렇듯 새로운 욕망을 창조하고, 그 욕망이 초래하는 문제점마저도 다시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기막힌 능력이 있는데, '제로'는 바로 이런 자본의 유연성과 기민함을 상징한다.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교묘히 파고들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덜어냄'이라는 가치를 '더하는' 방식으로 포장하여 소비를 끊임없이 부추기는 것이다.
제로 식품이 유행하는 제로 사회는 단지 일차원적인 웰니스의 열풍으로 이해하기보다 후가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자기 관리, 최적화, 그리고 허위의식을 반영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기호이다. '없음'을 통해 '있음'을 정당화하고, '덜어냄'을 통해 '더 큰 소비'를 유도하는 이 제로의 유행은 결코 질적으로 '비제로' 식품에 비해 건강하지 않다. 자본주의가 웰니스란 광명으로 소비자를 현혹할 때, 나는 이 시를 떠올린다.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저건 죽음이다/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유하, <오징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