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랄리즘과 자본주의: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

by 꿈꾸는 곰돌이

모랄리즘과 자본주의: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 도덕의 종말을 말하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본질에 내재한 모순을 지적했다. 특히 이윤율 저하 경향이 자본주의 체제를 결국 붕괴시킬 것이라고 예견했다. 유물론적 시선에서 보면 경제적 하부 구조뿐 아니라 상부 구조, 특히 도덕의 영역에서도 엄청난 모순이 드러난다. 도덕적 층위에서는 물신숭배와 같은 자본주의적 가치, 그리고 자본의 이윤을 재생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인다. 이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는데,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도덕이다. 기독교에서 죄로 여기는 일곱 가지 죄악(칠죄종)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본질과 어긋나는지 살펴볼까?

예컨대, 성의 상품화와 '일부일처제'라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충돌할 때, 자본주의는 노동 계급의 재생산을 위해 자신이 조장한 성의 상품화를 역설적으로 도덕적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 점에서, 색욕은 범죄다. 자본주의의 본질이 하나의 거대한 공창제와 다름없으면서도, 그 본질을 은폐한 채 도덕적 규범을 강요하는 식이다. 다른 예로,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을 동력으로 하는 소비 사회이기에 소비를 미덕으로 여긴다. 정부가 수시로 발행하는 민생 쿠폰에서 이러한 경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목적 앞에서는 '절약'이라는 모순된 허위의식을 강요하며, 과소비를 ‘탐욕’으로 규정해 도덕적으로 비난한다. 소비가 없다면 지속될 수 없는 체제인 주제, 청교도 정신을 고고히 여긴다. 결국 자본주의의 천박한 본질을 가리는 허위의식의 포장지가 바로 '도덕'인 셈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사고로는 감히 신성불가침 영역에 숨어있는 도덕이라는 허위의식을 붕괴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천박함은 중력처럼 총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1995년작 <세븐>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도덕주의라는 환상을 형성하는지, 어떻게 체제 유지를 위한 모순을 도덕으로 간주하려고 하는지, 그 거짓된 도덕을 사적 제제라는 개인적 실천으로 해결하려다 좌절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영화는 은퇴를 앞둔 베테랑 형사 윌리엄 서머셋과 정의감 넘치는 신참 데이비드 밀즈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두 형사가 쫓는 범인 존 도우는 성경의 일곱 가지 대죄를 모티브로 삼아 잔혹한 방식으로 피해자들을 처단한다. 여기서 그의 범죄는 단순히 사이코패스의 광기가 아니라, 현대 사회의 도덕적 죄악에 대한 독특한 심판극이자, 악의적으로 교묘하게 기획된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특히 그의 범행의 기저에 깔려있는 것은 (잘못된)성서적 모랄리즘이다. 그는 성서적 도덕률에 어긋나는 인물들을 처단하며 사적제제를 가하는데, 역설적으로 사적 제제로는 도덕을 성취할 수 없다는 메세지를 주기도 한다. 그의 끔찍한 범죄극을 통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가 우리의 도덕적 토양을 얼마나 말라붙게 만들고, 결국 정의와 복수, 선과 악의 경계마저 기괴하게 뒤섞어 버리는지 숨 막히는 고발이 이루어진다.


존 도우가 처벌하는 죄악들은 단순히 개인의 일탈적인 비도덕으로 보기 어렵다.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기고, 결핍을 조장하며, 치열한 경쟁과 외로움 속에서 인간 본연의 도덕적 가치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첫 번째 희생자인 '식탐'의 남자는 절제를 잊은 풍요로운 현대 소비 사회의 그늘을 보여준다. 배고픔 때문이 아닌, 넘치는 욕망에 이끌려 죽음에 이른 그의 모습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상징한다. 이어지는 '탐욕'의 희생자는 법망을 피해 부를 쌓아온 부패한 변호사다. 그 방을 붉게 물들이던 피는 탐욕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병리의 축축함을 고스란히 전한다. '나태'의 희생자는 중독에 빠진 채 사회 속에서 외면당하다가 결국 시체가 되어 발견된다. 이 사건은 무관심과 자기 파괴의 끝이 어디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색욕'의 희생자인 매춘부는 타락한 욕망의 도구로 전락해 파멸하고, '교만'의 슈퍼모델 역시 아름다움이라는 상품에 집착하다가 끝내 참혹한 결말을 맞는다. 연달아 이어지는 이런 사건들은 개인의 일탈을 넘어, 자본주의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도덕적 해이와 내면의 공허함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끝 모를 욕망과 성공, 그리고 물질만을 숭배하는 냉랭한 현실이 피로 물든 화면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도덕적 해이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악이고,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해도 결국 자본주의 체제가 도덕적 퇴락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은 분명하다.

서머셋은 이미 세상의 냉혹함에 단련된 노형사다. 그는 죄악으로 가득 찬 도시의 풍경을 씁쓸한 눈길로 바라보면서도, 그 안에서 아주 작은 인간성이라도 찾아내려 고군분투한다. 그와 달리 밀즈는 아직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순수한 열정과 정의감을 품고 있지만, 거대한 시스템의 벽 앞에서 번번이 좌절하고 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기형적인 민낯을 가장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존재는 오히려 살인마 존 도우일지 모른다. 그는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치유'하겠다며 광기에 젖은 심판을 자처하지만, 결국 그의 방식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오히려 더 깊은 절망과 혼돈만을 세상에 남길 뿐이다. 존 도우는 사회의 '악'을 거울처럼 비추면서, 동시에 그 스스로 '악'이 되어버린, 슬프고도 비극적인 존재다.

절망이 끝에 이른 자리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충격적인 배드 엔딩으로 관객을 몰아붙인다. 황량한 벌판 위에서, 존 도우는 자신이 '시기'의 화신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가 미리 준비해둔 마지막 '선물'—밀즈의 아내 트레이시의 목이 담긴 상자—가 나타난다. 자본주의가 그려낸 허망한 행복의 신기루, 그리고 가장 순수하고 밝던 존재인 아내와 뱃속 아이의 끔찍한 죽음은 영화 역사상 최악의 배드 엔딩이 아닐까. 여섯 명의 죽음은 자본주의가 끝내 품을 수 없는 가치들—사랑, 미래, 인간성—을 짓밟고 붕괴시키는 잔혹한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밀즈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결국 존 도우를 쏘아 죽이면서, '일곱 번째 죄'인 '분노'를 완성하고 만다. 이제 그는 자신이 미워하던 죄의 사슬에 스스로를 묶어버렸다. 정의를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 결국 가장 끔찍한 형태로 정의를 배신했고, 존 도우의 계획은 완벽히 실현되고 만다. 이 내밀하고도 잔인한 결말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혼돈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분노와 절망의 심연으로 추락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심연이 얼마나 끔찍이 어둡고 깊은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세븐>의 엔딩은 강렬한 절망을 남기는 동시에, 관객에게 묵직한 생각거리를 던진다.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의 도덕적 타락을 '응징'하려다 오히려 그 타락의 일부가 되고 마는 이 비극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까. 서머셋이 조용히 읊조리던 헤밍웨이의 문장—"세상은 아름답고, 싸워볼 가치가 있다고. 그 말의 뒷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은 비극적인 결말 한복판에서조차 사라지지 않는, 마지막 남은 희망의 조각처럼 다가온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이 냉정한 고발극을 통해, 자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도덕이 얼마나 손쉽게 위선으로 흐르고, 마침내 인간을 파괴하는 흉기가 되어버리는지를 매섭게 보여준다. 어쩌면 그 모습은 자본주의를 향한 핀처의 가장 차가운 조롱이다. <세븐>은 하드보일드와 네오 누아르라는 장르 비평의 관점에서도 흥미롭지만, 현대 사회의 도덕적 뿌리를 뒤흔들고 자본의 논리가 어떻게 인간성을 조금씩 갉아먹는지 끝까지 물고 늘어진 훌륭한 리얼리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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