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메시아: 극우적 판타지에 홀린 파멸의 구원자

<택시드라이버>, <세븐>, <조커>의 악인에 관하여

by 꿈꾸는 곰돌이

어둠 속의 메시아: 극우적 판타지에 홀린 파멸의 구원자들


영화를 문화비평의 층위에서 다루려면, 서사를 단지 현실을 특수하게 반영하는 창을 들여다보는 일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안에 깃든 욕망의 향방, 투영된 판타지를 포착하는 일이야말로 문화 비평가의 아르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영화나 현대 서사의 주인공은 마치 세상과 불화하는, 루카치가 말한 ‘문제적 개인’에 가깝다. 그리고 이 문제적 개인의 서사가 언제나 진보의 길만을 걷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대마다, 반동적 판타지를 끌어안은 작품들이 꾸준히 등장했다. (물론, 이 말이 영화라는 총체가 극우의 프로파간다라는 것은 전혀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포착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세 작품 모두 극우 성향의 감독이 만든 작품도 아니며, 극우 작품도 아니다)

예컨대 70년대 <택시드라이버>의 트래비스 비클, 90년대 <세븐>의 존 도우, 그리고 2010년대 <조커>의 아서 플렉(조커)은 모두 반동적 문제적 개인의 복잡한 얼굴을 보여준다. 각자 그 음영과 결은 다르지만, 모두 우파적 분노의 군상이라 부를 만하다. 이들에게 분노의 기원은 매우 복합적이지만, 그 분노의 화살이 향하는 곳은 기득권층이나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 속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적인 징벌 혹은 폭동과 같은 극단적 방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풀어내려 든다. 다시 말해, 극우적 메시아 판타지의 그림자를 공유한다.

물론 그 안에 담긴 극우 이데올로기의 결은 저마다 다르다. 트래비스 비클은 전형적인 파시즘의 욕망을, 존 도우는 기독교를 내세운 극우적 도덕주의를, 아서 플렉은 반기독교적 극우 포퓰리즘을 각각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단지 우연이 아니라, 시대에 유행하는 반동적 판타지가 인물에 투영된 것으로 보면 적절하다. 특히 조커는 오늘날 극우 포퓰리즘 이데올로와 이를 지지하는 대중의 정서가 극단으로 농축된 인물이라는 점 또한 시의성을 가진다.

위 인물들은 모두,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대중의 깊숙한 무의식에 살금살금 파고들며, 결국 파괴적 구원의 대리인을 자처한다.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정치적 낭만주의가 구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1. <택시드라이버> 트래비스 비클: 고독한 택시기사, 파시스트적 낭만을 좇다

어둠이 점령한 뉴욕의 밤거리를 표류하는 트래비스 비클. 마치 도시 전체가 겪는 악몽을 홀로 떠안은 몽유병 환자처럼 보인다. 그의 내면은 오래된 흑백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튀어나오는 사회의 ‘오물’에 대한 광적인 혐오로 얼룩져 있다. 자신이 직접 도시의 ‘쓰레기’를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힐 때, 그는 타인과의 대화나 비판적 성찰이 완전히 봉쇄된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다. 그리고 그 좁은 세계에서 유일한 ‘구원자’로서 스스로를 임명한다. 이 굴절된 영웅주의, 즉 합리성에 대한 반항이 극우적 상상력과 결합할 때, 트래비스의 판타지는 독특한 방식으로 폭주한다.

트래비스는 복잡한 사회문제 앞에 공동체적 고민이나 구조적 해결을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총구 앞에서 세상을 단순하게 만들어버리고픈 충동에 사로잡힌다. 대화나 합리적 판단 대신, ‘힘’과 ‘단죄’의 쾌감을 좇는 이 방식은, 극우적 낭만주의의 전형에 가깝다. 혼자라고 해서 무력하지 않다. 오히려 고독은 그를 신적인 존재로 상상하게 만들고, 결국 ‘구원을 위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힘이 된다. 칼 슈미트가 ‘예외 상태’라고 불렀던 그 광기의 자리에, 트래비스는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주권자가 된다. 그는 법 밖에서, 스스로가 곧 법이며 심판관인 셈이다. 피 묻은 그의 손끝은, 혼란스러운 대중이 꿈꾸는 강력한 리더의 환상을 상징한다. 동시에, ‘단호한 조치’를 열망하는 누군가의 위험한 상상력에 은근히 기름을 붓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도르노가 말한 허위의식에 찌든 시민사회에 대한 분노가, 트래비스 안에서는 극적으로 폭발한다. 그렇게 문제적 개인, 트래비스 비클은 오늘도 뉴욕의 밤거리를 떠돌며 게이, 부랑자, 매춘부를 혐오한다.

2. <세븐> 존 도우: 기독교적 신정 판타지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세븐>에서 존 도우는 단순한 사이코패스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자신을 ‘신의 도구’라 여기고, 칠죄종을 벌하는 광기에 사로잡힌 심판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존 도우는 무감각해진 현대 사회의 도덕적 해이를 신랄하게 꼬집으며, 기독교적 윤리로 돌아갈 것을 무섭게 강요한다. 그의 살인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타락한 인류에게 보내는 냉혹한 경고이자, 새로운 질서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려는 끔찍한 종교적 심판행위이다. 존 도우가 구현하는 세계는 절대적인, 틀림없는 진리로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고 새로 세워야 한다는 극단적 원리주의, 신정주의 판타지의 한 복판이다. 그는 인간의 나약함과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모든 죄를 철저히 부정하며, 오직 자신이 그은 엄격한 도덕률만이 유일한 답이라 믿는다. 법과 정의 역시 그에게는 이미 쓸모를 잃은,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된 실패작일 뿐이다. 존 도우는 스스로를 시대와 도덕을 초월한 잣대로 삼고, 이른바 ‘신성한 임무’의 이름으로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하게 된다.

그의 행위는 알튀세르가 언급한 ‘이데올로기적 주체화’가 가장 격렬하고 극단적으로 드러난 예시다. 그는 특정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저 ‘호명’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이데올로기를 자기 손으로 재구성해, 폭력적인 방식으로 타인에게까지 강제로 주입하려 한다. 관객이 존 도우의 메시지에 불쾌함과 동시에 묘한 동조의 기운까지 느끼게 되는 순간, 우리는 현실의 불완전함 앞에 서서 ‘절대적 정답’이라는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인간 심리의 어두운 일면을 맞닥뜨리게 된다.

3. <조커> 아서 플렉(조커): 혼돈과 파괴의 극우 포퓰리즘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에서 아서 플렉은 사회 시스템이 낳은 처참한 희생자이자, 그 붕괴를 드러내는 폭로자다.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조롱받으며 살아가던 약자 아서는, 슬픔과 분노, 소외의 경험이 응축돼 결국 기존 질서에 맞서 폭발하는 ‘혼돈의 상징’이 된다. 그의 광기와 폭동, 그리고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는 무너진 공동체와 허물어진 안전망을 배경으로, 억눌린 자들의 분노만이 유일한 언어로 남겨진 시대의 쓸쓸한 자화상을 그려낸다.

조커에게서 우리는 질서를 모두 파괴하고 완전한 혼란 속에서 ‘새로운 힘의 균형’—혹은 무정부적 상태—를 모색해야 한다는 파괴적이고 급진적인 판타지를 읽어낼 수 있다. 그는 체제를 지키려는 어떤 노력도 허망하다고 여기며, 오로지 ‘해체’와 ‘격변’이라는 극단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유와 정의가 도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듯하다. 조커의 미친 웃음과 폭력성은 낡은 권위에 보내는 조롱이자 전복의 신호이고, 실제로 사회적 불만과 좌절을 등에 업은 서방 세계의 극우 포퓰리즘과도 묘하게 겹쳐진다. 아서 플렉이 조커로 거듭나고, 그가 사회적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순간 우리는, 기득권층의 무책임 속에 분출하는 억눌린 욕망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위험한 형태로 표출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된다.

이 세 인물은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아가고, 다른 서사로 극우화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정상 국가인 미국이라는 토양에서 자란 괴물들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구원은 오직 나에서 시작된다’는 독선과, ‘세상의 정화는 폭력적 단죄로만 가능하다’는 극단주의적 믿음을 공유한다. 그들에게 공동체적 연대, 민주적 절차, 상호 이해와 같은 가치는 오히려 걸림돌일 뿐이다. 영화는 이들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넘어서 ‘강력한 누군가가 엉망진창인 세상을 한 번에 끝내버려줬으면’ 하는, 우리 내면의 암울한 메시아 판타지를 조심스럽게 흔들고, 질문을 던진다. 파멸의 구원자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다. 우리는 정말 어둠을 헤치고 빛을 찾고 싶은지, 아니면 오히려 어둠 그 자체에 이끌려 그 속에서 묘한 위안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 이 세 캐릭터를 마주한 우리의 마음속에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질문이다. 겉보기에 그들은 사회의 부조리를 겨누고 있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오직 더 거센 폭력과 혼돈만 낳는 반동적 구원의 서사를 포착할 수 있다.

월,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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