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뼈>, 식민지 남성성의 전형

by 꿈꾸는 곰돌이


<피와 뼈>는 재일조선인 김준평의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그려낸다. 이 영화는 김준평이라는 식민지 인물을 너무나도 파괴적으로 그려내, 어쩌면 혐한 영화가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정도로 모질고 가학적이다. 도대체 이 작품이 무엇을 보여주려는지 잠시 혼란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이 잔혹한 폭력성 너머에서,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소위 ‘식민지 남성성’의 전형이 선연하게 드러난다. 김준평의 독재와 폭정에는, 식민주의라는 거대한 폭력의 사슬이 드리워져 있다.




1. 식민지 남성성, 찢겨진 자아의 비명


김준평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더 큰 세상을 꿈꾸며 일본 오사카(대합)로 건너가며 영화가 시작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족쇄가 그의 인생을 끝내 옥죈다. 어디에서도 온전한 사람으로, 주체적인 존재로 설 수 없는 그의 마음에, 잃어버린 땅과 하늘에 대한 상실감이 본능적으로 스며든다. 그 무게는 그의 어깨와 등허리를 내리누르며, 잠시도 숨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류 사회의 냉담하고 싸늘한 시선 아래, 그는 끊임없이 ‘이방인’이자 ‘타자’로 내몰리며 존엄이 뿌리째 흔들리는 현실을 마주한다.




이런 근원적인 박탈감은 그의 내면 어딘가에서 풀리지 않는 독처럼 자라났다. 세상 모든 문이 자신에게만 굳게 닫혀 있다는 절망 앞에, 김준평은 타인의 삶을 거절하고 맹렬한 방식으로 자기만의 남성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 남성성’이다. 이는 식민제국의 억압 아래 ‘여성화’된 식민지 남성이, 상처받은 남자다움을 회복하려고 오히려 동족이나 약자를 향해 폭력을 휘두른다는 페미니스트 이론이다. 그런 초상은 한국 근대 소설의 남성 인물들에게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한다.




김준평의 폭력성은 이 식민지 남성성의 가장 사나운 얼굴이다. 찢기고 박탈당한 자아가 분노로 훌쩍 일어나, 존재 자체를 증명하려고 몸부림친다. 그가 휘두른 권력은 존경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얻은 허망한 왕관일 뿐이었다. 살인과 고리대금, 육체를 소진하는 투쟁의 나날 속에서 그는 돈을 쌓고 힘을 과시했지만, 이는 외면당한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었고, 자기 증명에 실패한 파괴적 잔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피와 뼈> 속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차별은 놀랄 만큼 적게 등장한다. 식민 지배의 설움보다는 김준평 개인의 악랄함이 전면에 부각된다. 영화가 시작될 무렵 “만세!”를 외쳤다가 집단으로 얻어맞는 인물이나, 조선 독립을 외치는 학교 학생들처럼 일말의 식민지 요소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끝내 김준평이 왜 그렇게 괴물이 되어갔는지의 과정보다는, 그가 얼마나 흉악한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재일교포 감독과 원작자 소설이 아니었다면, 누군가는 이 영화를 혐한 영화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극적으로 다가온다.




2. 가부장의 폭력


김준평의 폭력이 유독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칼끝이 언제나 가장 가까운 존재, 특히 여성들을 향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내 이영희에게 퍼붓는 끝없는 구타와 폭언, 그리고 기요코나 사다코 같은 주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학대는, 바깥세상에서 받은 좌절과 분노, 굴욕이 어떻게 가족과 약자로 고스란히 흘러드는지를 처연하게 보여준다. 여성은 그에게 빼앗긴 ‘무언가’를 마음껏 되찾고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내부의 ‘식민지’가 되어버린다.


그중에서도 아내 이영희는 어머니이자, 이미 잃어버린 조국의 은유로 읽힌다. 김준평이 이영희를 짓밟는 행위에는 식민의 상처 속에서 어머니, 혹은 조국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무의식적 죄책감과 분노가 뒤엉켜 괴기스럽고 가학적인 분출로 이어진다. 그는 가정을, 자신의 폭력적인 욕망을 제멋대로 투사하는 무너진 공간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식민 지배자’가 되어버린다. 세상에 당한 폭력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그 역설은, 스스로 다시 사슬을 이어 거는 비극적 반복만을 남긴다.




이처럼 <피와 뼈>는 한 인간의 폭력이 어디서, 어떻게 흘러나왔는지, 그리고 그 폭력이 주변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드는지 서늘하면서도 슬픈 시선으로 응시한다. 김준평의 이야기는 식민지라는 시대와 그 후예의 슬픔이 남긴 성난 외침이자 비극의 연쇄로 이어진다.




3. 핏줄을 따라 흐르는 저주


김준평에게서 비롯된 왜곡된 남성성은 핏줄을 타고 흐르듯 자식들에게까지 옮아가, 끝끝내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유산으로 남는다.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온기나 든든한 그림자를 받기는커녕, 거대한 두려움과 멸시의 형상을 마주하게 된다. 아들 다케시와 마사오는 그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결국 가장 아끼던 손자 류이치마저 마지막에는 스스럼없이 내쳐진다. 이런 결말은, 식민지 남성성이 어떻게 집요하게 다음 세대의 삶을 뒤틀고 파괴하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부성이 차지해야 할 자리는 폭력과 결핍으로 깊이 패인 상처만이 남아 있었고, 김준평은 자신의 뒤틀린 삶과 굴절된 역사의 그림자를 끝내 자식에게까지 투영하며 집착과 광기에 사로잡혀 버리고 만다.


영화의 결말은 노쇠하고 병든 김준평이 차디찬 북한의 황야에서 혼자 쓸쓸히 최후를 맞이한다. 평생 자신이 가한 폭력의 끝이, 한 사람만의 파멸에 그치지 않고 소중한 주변마저 잃게 만든다는 사실을, 고립된 만년의 모습으로 혹독히 증명한다. 김준평의 인생은 주류 사회의 억압을 온몸으로 맞서다가 어느새 자신이야말로 폭력의 화신이 되어버린 한 시대의 잔혹한 역사, 그 피와 뼈로 써내려진 비극의 초상으로 남아, 오래도록 가슴에 각인된다.


그의 폭력은 과연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을까, 혹은 역사의 짙은 그림자가 남긴 필연의 상흔이자 또다른 대물림이었을까. 영화가 아쉽게도 이 질문에서 전자를 너무 쉽게 택하고 만다. 영화의 스크린을 붉히는 잔인한 폭력 연출은 사유보다 끔찍한 감각만 남게 된다. 이런 완성도 부족은 영화의 정치성을 퇴보하게 만든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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