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퍼펙트 데이즈>

: 느림과 아날로그의 미학

by 꿈꾸는 곰돌이


긍정으로만 점철된 피로사회. 한병철이 날카롭게 지적했듯, 과도한 긍정은 오히려 우리를 일상의 피로 속에 가두고 만다. 자기 자신을 끝없이 착취하는 삶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세상. 그 안에서 개인은 쉬지 않고 소모된다. 존재의 의미는 저만치 멀어지고, 우리는 서서히 ‘사물’이 되어간다. 결국 현대인은 줄곧 존재론적 위기에 시달리면서도, 삶의 진짜 의미마저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이 정한 기준에 내맡기기 일쑤다.
이렇듯 거센 흐름 속에서,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느리지만 진실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쿄의 공중화장실을 묵묵히 청소하는 사내, 이름하여 히라야마. 한없이 느리고 소박한 그의 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피로에 무뎌진 우리 마음에도 잔잔하지만 깊은 파문이 인다. 히라야마의 일상은 어쩌면 알베르 카뮈가 말한 ‘부조리’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시지프 신화>의 시시포스처럼, 그는 반복되는 노동에 매일같이 몸을 내맡긴다.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늘 그 자리에서 화장실을 깨끗이 하고, 뚜렷한 목표 하나 없이 묵묵히 하루를 살아낸다. 바위를 끝없이 산꼭대기로 밀고 또 미는 시시포스처럼, 그 반복은 때론 무의미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시시포스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맞서 의미를 만들어냈듯, 히라야마 또한 스스로를 얽매는 사회적 낙인과 단조로움의 굴레를 자기 의지로 조금씩 일그러뜨리고 깨어낸다. 그에게 노동은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소외의 노동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삶 자체를 긍정하는 작고 느린 수행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히라야마의 눈에 화장실은 그저 ‘더러운 공간’이 아니다. ‘모두가 오가는 소중한 곳’이라 여기며, 그곳을 닦아내는 일에 애정을 쏟는다. 반복되는 손길 속에서 그는 자신과 세계를 연결하고, 실존의 의미를 조용히 되새긴다.

히라야마의 노동은 루카치가 말한 사물화의 그늘에서 한걸음쯤 벗어나 있다. 그의 청소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성을 단단하게 다져주는 역설적 빛을 띤다. 영화 속에 잠깐 스치듯 나타나는 그의 가정사 역시 흥미롭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왜 굳이 이런 길을 택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지만, 그것은 어쩌면 불화한 가족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주체성을 되찾기 위한 선택 아닐까 싶다. 히라야마는 청소를 통해 그저 더러워진 공간만 정화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자기 내면을 조망하고, 모르는 이의 삶조차 경건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렇게 히라야마의 느린 걸음은 한병철이 말한 성과사회의 강박에서 벗어나는 실존적 선언이 된다. 이 느림은 부조리한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다시 태어나는 귀한 기회가 된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성과와 생산성의 족쇄에 묶여 점점 소외되어가지만, 히라야마는 청소의 느린 리듬 속에서 자기 존재를 회복한다. 그리고 저녁마다 펼쳐 드는 책 한 권에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차곡차곡 채워나간다. 그에게 공중화장실 청소는 실로 현대판 시시포스의 노동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아날로그 요소들은 히라야마의 실존적인 선택을 더욱 또렷하게 비춰주는 역할을 한다.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카세트테이프 모음, 그중에서도 루 리드의 'Perfect Day'는 아날로그의 상징성을 한층 깊게 새긴다. 이 노래는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하루를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 멜로디 뒤편에는 상실과 중독이라는 어둠이 은근히 드리워져 있다. 히라야마가 이 음악을 들으며 떠올리는 감상도 단순한 기쁨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이란 복잡한 희로애락―실존적 번뇌와, 그 아픔마저 기꺼이 안고 살아가는 과정을 닮았다. 마치 오래된 LP나 테이프가 내뿜는 미세한 잡음과 불완전함이 오히려 그 음반만의 고유한 매력으로 느껴지듯, 존재의 아름다움 역시 결함 속에서 빛난다.

히라야마는 매일 아침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필름 카메라에 담는다. 그 행위는 지나가는 순간을 꼭 잡아두려는 마음이자, 한 장면을 영원히 가슴에 남기고 싶은 바람이다. 현상과 인화를 거쳐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필름 카메라의 세계는 서두르지 않는다. 빠른 결과에 길든 디지털과는 달리, 이 느린 과정은 손끝의 온기를 담아내며 진득한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이 더딘 흐름 자체가 세상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또렷이 새기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쌓여가는 기록은 분명히 히라야마만의 역사다. 아날로그적 취향을 고수하는 히라야마의 태도는 단순한 향수나 옛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그는 느림을 삶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느림은 과잉 정보에 지친 감각을 풀어주고, 사물과 나 사이에 깊고 조용한 연결을 만들어낸다. 이 아날로그적 몰입의 시간이야말로, 그가 세상과 자신을 만나는 특별한 통로가 된다.

영화는 히라야마의 평온해 보이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순간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가출한 조카 니코의 방문이나,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이 일으키는 변화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에서 히라야마의 세계는 조금씩 흔들린다. 하지만 그는 이런 변화를 위협이 아니라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 묵묵히 자기만의 느린 리듬으로 균형을 찾는다. 되도록 언어나 감정 표현을 절제하고, 조카든 식당 주인이든, 심지어 노숙자와 나누는 대화조차 간단명료하다. 그러나 그 침묵 너머엔 신뢰와 성실이 묻어난다. 최소한의 대화, 눈길 한 번, 짧은 인사 속에서 타인에 대한 존중과 유대감이 조용히 자란다. 이 절제된 소통의 틈새에서 히라야마는 '실존적 타자'로서의 타인을,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또렷이 인식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처럼, 그는 고요한 고독 속에서도 자유와 책임을 바탕으로, 순간순간 자기 삶을 새로 만들어간다.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느림과 완급조절에 있다. 자극적인 속도에 익숙한 요즘 관객들에게, <퍼펙트 데이즈>가 보여주는 느림의 미학은 오히려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하루하루를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히라야마처럼 천천히, 실존적으로,원어의 정확성을 그대로 살리자면 '탈존적으로' 살아가는 삶은 그 자체로 잔잔한 위로가 될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피와 뼈>, 식민지 남성성의 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