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향해 쏴라>

서부 개척 시대의 낭만

by 꿈꾸는 곰돌이

서부 개척 시대의 낭만, <내일을 향해 쏴라>


올해도 유난히 많은 별들이 밤하늘에서 스러져 갔다. 그중에는 영화감독이자 배우였던 로버트 레드포드, 한 시대를 수놓은 거장도 있었다. 그의 빛나는 재능을 떠올리며, 배우로서 그가 남긴 찬란한 유산 중 하나, 바로 1969년 조지 로이 힐 감독의 명작 <내일을 향해 쏴라>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개봉 당시 흥행 1위를 기록하며 기념비적 작품으로 자리 잡은 이 영화는,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결코 빛을 잃지 않는다. 스크린 한가운데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가로지르던 전설의 무장 강도 듀오가 서부의 황혼진 초원을 내달리던 그 모습에는,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이 꿈껐던 절대적 자유와 개성에 대한 그리움이 오래도록 맴돈다. 서부 개척의 황혼이 져가는 시대, 목가적인 삶이 점차 사라져 가는 끝자락에서 깃든 애상과 진한 향수… <내일을 향해 쏴라>는 어느새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내일을 향해 쏴라>는 분명 서부극에서 한 걸음 벗어난다. 감독으로서는 존 포드, 배우로서는 존 웨인 식의 고전적인 서부극이 선과 악을 뚜렷하게 나뉘는 단조로운 구도(적어도 <수색자> 이전까지)를 가졌다면, 이 영화는 서부 개척 시대의 끝자락을 배경으로 경쾌하고 서글픈 피카레스크 서사를 풀어놓는다. 정의로운 영웅적 주인공이 사악한 악당(인디언, 무법자)을 물리치는 이분법 대신, 기존 사회 도덕상 악당에 위치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다룬다.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는 도덕의 잣대 밖에서 오직 자신들만의 규칙으로 살아가는, 인간적이고 매력적인 아웃사이더로 그려진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기존 질서에 맞선 반항’, ‘회피'라는 19세기 낭만주의의 미학을 되살린다. 이들은 세상의 법칙 따위에 순응하지 않고, 광활한 자연을 무대로 살아가는 마지막 낭만주의적 무법자였다. 이 영화는 깊은 철학적 사유나, 거대한 주제 의식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는다. 혁신적 서사 구조도 아니다. 오히려 부치와 선댄스, 역사상 악인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의 전기를 유쾌하면서도 감상적으로 펼쳐 보일 뿐이다. 하지만 서부 개척이라는 커다란 역사의 수레바퀴가 끝나가던 ‘후기 서부’ 시기에, 이 둘의 이야기는 독창적인 캐릭터와 시대적 욕망이 담기며 특별한 힘을 얻는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자본주의의 질서와 문명화가 빠르게 밀려오던 서부의 황혼녘 풍경에 맞서, 주인공들이 끝내 ‘불화’와 ‘탈주’를 꿈꾼다는 데 있다. 그들의 목가적인 여정은 1960년대 말, 극단의 자본주의 속에 숨 막히던 사람들의 억눌린 마음을 정교하게 투영한다. 어쩔 수 없이 정해진 시스템에 순응해야만 했던 현대인들은, 돈(자본주의의 표상)을 털어 달아나는 이 두 도적에게서 비밀스러운 해방감과 대리 만족을 느꼈으리라. 무채색 도시와는 전혀 다른 <내일을 향해 쏴라>의 서부 풍경—그곳에는 잃어버린 자유와 원초적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갈증이 알알이 담겨있다.

반세기도 더 지난 이 오래된 영화에서, 우리는 여전히 낡은 질서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 가는 부치와 선댄스에게 알 수 없는 경외와 동경을 보내고 만다. 자본주의가 어지럽게 번갈아 질주하며 물질은 넘쳐나지만, 그만큼 개인의 삶은 더 단단한 틀에 갇혀버린 지금. 불확실함과 두려움이 일상처럼 드리운 오늘, 새로운 자유를 꿈꾸며 방랑을 멈추지 않다 강렬히 전사하는 둘의 최후에서 무의식적인 용기와 위안을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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