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신파 비판

by 꿈꾸는 곰돌이

한국 영화의 흥행 공식 가운데 하나이자, 동시에 비평가들에게 자주 비판받는 대표적인 요소로 ‘신파’를 들 수 있다. 원래 신파극은 19세기 서양식 희곡을 국내 무대에 옮긴 연극을 가리켰고, 전통극과 달리 ‘새로운 극’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됐다. 하지만 오늘날 ‘신파극’이라는 말은 본래 뜻에서 멀어졌고, 대부분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인다. 쉽게 말해 신파란 감정에 크게 의존해 관객의 눈물을 유도하는 작품을 일컫는다.


여기에서 나는 ‘한국형 신파극’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하고 싶다. 21세기 들어 특히 가족 이야기를 중심에 둔 드라마 장르를 가리키며, ‘가족의 희생, 용서, 사랑을 부각하고, 가족애라는 이름 아래 감정을 극대화하는 가족 중심 서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국제시장>(2014), <7번방의 선물>(2013), <부산행>(2016) 등이 있다. 이 영화들은 모두 가족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두고, 대중과 강하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동시에 평단의 집중적인 비판도 받았다.


한국형 신파극의 핵심은 가족애를 내세운 강렬한 감정 자극이다. 비극과 희생을 강조하며, 관객의 눈물을 이끌어내는 데 촬영과 극의 서사를 몰두한다. 가족 내 충성심과 헌신은 개인적 고통을 넘어 공동체적, 국가적 가치를 담게 된다. 그런데 이런 감정의 동원이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라는 더 큰 정치적 장치로 작용해, 사회의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거나 가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지적받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제시장>은 6.25 전쟁 이후 한국 근현대사를 가족의 희생 서사와 엮어 그린다. 주인공 덕수는 가족을 위해 온갖 시련을 견디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가족 사랑을 국가 사랑과 연결해 ‘가족 위해 헌신하는 개인’을 이상화한다. 그러면서도 개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국가주의적 애국 담론에 힘을 실어준다. 즉, 가족 문제를 넘어선 사회적 상처를 다층적으로 읽는 대신 가족주의 담론만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7번방의 선물>은 지적 장애가 있는 아버지와 딸 사이의 뭉클한 관계를 내세워, 사회적 약자의 고통과 가족의 희생을 더욱 극적으로 그린다. 가족애와 용서로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모든 갈등과 해결을 가족의 품 안에서만 풀어가며, 그 과정에서 사회 구조적 문제나 법 자체의 불합리함에 대한 깊은 성찰은 빠진다. 감정의 아름다움 뒤에는 결국 ‘가족이 모든 짐을 떠안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부산행>도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독특한 배경 속에서 가족애를 중심 축으로 삼는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통해 희생과 구원의 이야기를 담아내는데, 이런 감정선이 관객의 몰입을 높인다. 다만 신파적인 가족 서사 덕분에 신선함이 희생됐다는 평가도 있다. 좀비물 특유의 장르적 참신함이 마치 김치로 만든 파스타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져, 국내외에서 호불호가 갈렸다. 특히 해외에서는 부성애를 앞세운 감동이 호평받았지만, 국내에서는 감정 몰입 위주의 연출 때문에 작품성이 떨어졌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처럼 신파극은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감정을 인위적으로 소모시킨다. 개인은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사회의 구조적 문제나 갈등은 가족애라는 현실적 이정표 아래 쉽게 묻혀 버린다. 가족의 희생과 용서라는 명분 아래 기존의 권력 질서나 국가적 담론이 그대로 유지되고, 대중은 감정을 소비하는 사이 보수적 가치관이 강화된다. 감정은 얼마든지 정치적으로 조작될 수 있는 자원이 되고, 신파극은 그 전형적인 사례로 꼽힐 수 있다. 자크 랑시에르나 진은영 시인의 ‘감각적 분배’ 개념을 빌려보면, 신파극 비판 사회 문화적 구조와 깊게 연결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 개념은 사회와 정치에서 감각 경험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권력의 대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일반적인 미적 체험을 넘어서, ‘누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며, 감각적 공간이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배제의 장으로 기능함을 뜻한다. 감각적인 것의 분배는 특정 집단이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반면, 다른 집단은 그 영역에서 배제되어 소외된다. 이렇게 감각과 인식의 경계가 재편성되면서, 사회의 권력관계가 강화되고 유지된다.


한국형 신파극을 이 개념으로 재해석하면, 신파극이 가족애와 희생을 중심으로 특정 감정을 과잉 배분하며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감각적 영역을 장악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슬픔과 희생이라는 가족 중심 감정이 강력히 분배되어 관객의 감각과 정서가 그 틀 안에 갇히고, 다른 사회적 문제나 분노의 감정은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신파극은 이런 감성의 분배를 통해 기존의 권력 질서와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장치로 작동하며, 사회 현실의 복잡성을 가족이라는 즉자적 테두리 안에 은폐한다.


나는 신파극 속 감정 노동은 정치적 조작의 한 형태라 생각한다. 랑시에르의 시각에서 보면, 신파극은 대중에게 감각과 경험을 분배하는 방식을 독점하며, 감정적 반응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두어 사회적 저항이나 변화의 가능성을 축소한다. 이러한 ‘감각적인 것의 분배’는 결국 가족주의 신화를 강화하고,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고된 삶과 실존의 방황으로부터 하나의 이정표는 가족이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신파 영화에 눈물을 흘리고, 흥행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긴 하다. 그러나 이를 유통하여 정치적 자극 없이 인위적 감동만을 야기하는 영화 산업계에는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가족애’라는 순수한 가치 아래서 감정적 착취가 일어나고, 가족주의 신화가 한국 사회 현실의 복잡한 모습을 가리는 구조 역시 계속 반복되고 있다. 특히 신파에서 자주 쓰이는 슬픔이라는 감정은 무기력함과 맞닿아 있다. 영화 속 신파는 애도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채, 멜랑콜리의 감정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이렇게 될 때 사회에 대한 분노는 결국 개인의 무기력으로만 남게 되며, 분노를 좌절시킨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볼 때, 신파극에 대한 비판은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나아가야 한다.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해체는 문화비평의 지형에선 좌파들에겐 최우선과제이며, 한국 영화를 비판하는데 핵심적으로 논쟁할 지점이다. 감성? 모든 것이 사물화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인간다운 가치이다. 그러나 그 감성마저 조작하는 신파극을 비판해야 하며, 가족이 아닌 다른 것에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가족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아닌 계급과 역사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영화가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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