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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Nov 05. 2023

계급 사회는 어떻게 등장했을까? (feat.역사유물론)

너희가 민중의 역사를 아느냐? <민중의 세계사> 강독 /1부


일곱 개의 문을 가진 테베는 누가 지었을까?
책들에는 왕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왕들이 돌덩이를 날랐을까?
그리고 여러 번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 바빌론을 누가 그렇게 여러 번 세웠을까? 건축노동자들은
황금빛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
만리장성을 다 쌓은 날 저녁,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을까? 위대한 로마는
개선문으로 가득 차 있다. 카이사르들은
누구를 무찌르고 개선했을까? 수많이 노래된 비잔틴에는
시민을 위한 궁전들밖에 없었을까? 저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에서조차도
바다가 덮친 날 밤,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자들이
자신들의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혼자서 했을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무찔렀다.
그는 취사병 하나쯤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리프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했을 때
울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
승리한 자는 없을까?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십 년마다 큰 인물이 나온다.
그 비용은 누가 댔을까?

이렇게 많은 보고들,
이렇게 많은 의문들.


-브레히트의 '독서하는 노동자의 질문'


위대한 권두시로 여는 크리스 하먼의 <민중의 세계사>는 역사유물론에 기반한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완성된 이름 모를 민중들이 써낸 서사시이자 일종의 레퀴엠이기도 하다. 크리스 하먼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이나 헤겔류의 역사주의와 정반대로 관념론이 아닌 유물론을, 압제자가 아닌 민중의 시선으로 서사시를 집필한다. 


요약은 다음과 같다. 


1.계급사회의 등장

프롤로그

-이 장의 핵심은 서구 세계의 오랜 잘못된 통념인 계급 이전의 사회가 곧 야만의 사회였다는 것에 대한 반박이다. 최초의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출현한 이후, 초기 이후는 끊임 없이 진화했다. 약 15만년 전, 의사소통 수단과 사물을 개념화하는 능력이 발전했다. 이때부터 현생 인류의 탄생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후 9만년 전에는 아프리카를 벗어나 1만 2천년전 아메리카 해협에 도착함으로써 남극을 제외한 모든 곳에 인류가 살게 되었다. 이때 서로 언어가 달라지며, 환경에 따라 적응하면서 점차 사회마다 고유의 관습, 태도, 신화, 제의가 생겨난 것도 그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1만년 까지 인류 사회는 어느 정도 공통의 특징들을 공유했는데, 대표적으로 채집이 있다. 당시 사회들을 채집 사회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채집 사회는 서구의 묘사와 달리, 역겹고 야만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30~40명, 혹은 다른 무리와 합쳐 200여명 정도가 무리를 이루고 살았고, 문명화된 농업 사회나 무리 사회의 삶보다 결코 못나지 않은, 원시 풍요 사회었다. 이 사회는 무엇보다 계급이 없었고, 그래서 호혜의 원리에 기반해서 작동한다. 오늘날 계급사회에서 인간 본성은 악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인간본성은 매우 유연하다. 계급 없는 사회에서는 평등주의와 이타주의에 따라 움직인다. 먼저, 수렵자와 채취자가 불가피하게 서로 긴밀히 ‘공존’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도 없었다. 성별에 따른 노동 분업이 있어서 남성은 대게 사냥하고, 여성은 대게 채취했지만 이는 여성이 사냥에 참여하면 아이가 위험해지고 그에 따라 무리의 재생산도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당일 구할 수 있는 식량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채집 무리의 통상적인 규모도 제한될 수밖에 없어서 사유재산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당시 사회들과 지배적인 관념들은 오늘날과 무척이나 달랐고, 수천년 동안의 변화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원시공산주의의 일부였던 원씨적 물질 조건을 극복하는 인간의 능렦은 점차 커진 반면, 특권을 누리는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 조직 형태들이 잇달아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원시공산주의 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수백 세대 동안 간직해온 삶의 가치들에 바탕을 두는 사회에 그 부를 종속시킬 수는 없는지 하는 의문은 모든 사람에게 중요할 것이고, 이를 위해 계급 지배와 국가가 어떻게 출현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1-1.신석기 ‘혁명’

인류의 삶의 첫 번째 대규모 변화는 1만 여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세계 몇몇 지역, 특히 중동 지역에서 사람들은 먹고 사는 새로운 방식-농작물 재배가 생겨났다. 이런 변화가 마냥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소집단으로 흩어져 더 오래전 원시 유목 생활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노동을 통해 자연의 부족분을 보충하는 모종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중 후자를 택한 사람들이 농업을 했고, 야생의 식물 씨앗을 땅에 뿌림으로써 안정된 식량 공급을 할 수 있었다. 노동 방식과 생활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세계관이 생겨나ᆞ갔다. 그 세계관은 다양한 신화와 종교 의례로 나타났다. 이 변화는 정교한 신석기 도구의 출현과 관련 있었기 때문에, 보통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르며, 장기간에 걸쳐 일어났지만 노동과 생활방식의 철저한 재편을 수반하는 과정이었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사회가 조직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의미심장한 발전은 사냥뿐 아니라, 전쟁에도 쓰이는 무기가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 사회의 생활방식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세계 여러 지역에 남아있던 약탈농법 사회들과 유사하며, 사유지가 없었다. 사유재을 모으려 하지 않았으며, 각 가구는 같은 조상을 둔 씨족이라는 더 넓은 사회 집단에 통합되어 있었다. 약탈농법 사회의 핵심 가치관은 계급 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관보다 수렵-채취 사회와 비슷했다. 그래서 한 예로, 18세기 초 이로쿼이족을 보면 자기들이 굶어 죽더라도 새로 온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줬는데, 이러한 이타주의 역시 먹고 살기 위한 필요에서 비롯된다. 농업에 기반을 둔 정착 생활에서는 아이를 낳고 몇 개월만 지나면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었고, 더 많은 아이들을 나야 농업에 유리했다. 그래서 대가족을 이뤄 살았고, 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렵 채취 사회와 달리, 촌락에는 저장된 음식과 물품이 있었고, 그 전에 거의 없었던 전쟁이 약탈농법 사회에서는 풍토병이 되었다. 이 때문에 사회 통제를 위한 공식 의사 결정 체제가 더 필요해졌으머, 연장자들ㄹ로 이뤄진 씨족 회의가 생겼다. 이후 1만년 동안 거의 모든 지역에서 농경 사회로 바뀌었으며, 모든 경우에 느슨한 무리 생활은 체계적인 혈족-엄격한 사회적 행동 규범-종교적 의식과 신화를 통해 조직되는 촌락 생활로 대체되었다. 일부 수렵-채취 사회는 공식을 지배하지 않은 채 가축을 사육하는 방식으로 농업의 한 가지 측면을 수용해 유목민이 출현하기도 했다. 이러면서 처음으로 사회적 지위의 분화가 나타났는데, 일부 개인이나 혈통에게 더 큰 권위를 부여하는, 족장 제도나 중요 인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등장했다. 족장 제도는 세습 족장과 족장 혈통의 확립으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계급 사회인 것은 아니었다. 사회의 한 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노동으로 창출된 잉여를 소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식석기시대에 일어난 농업혁명은 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았고, 촌락 생활ㄹ과 전쟁을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진정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계급 분화, 상근 관료, 무장 집단 등등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 하는 요소들은 거의 없었다.      


1-2.최초의 문명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의 기원은 5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흔적이 바로 이집트와 메소아메리카의 피라미드/이라크의 지구라트/크레타의 크노소스 궁전 등이 그 예시이다. 고든 차일드는 이런 변화를 ‘도시혁명’이라고 불렀다. 이 유적들 자체도 놀랍지 만, 초보적인 농경에 기반을 둔 순수한 농촌 생활에서 이 유적들이 생긴지 몇 세대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자도 만들고, 청동으로 장신구와 무기를 만드는 방법도 발견했는데, 이 시기를 보통 ‘청동기시대’라고 부른다. 생계방식에서 먼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런 변화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변화는 주로 농업에서 일어나며 생산성이 막대하게 증가했다. 이 일부 지역에서는 여가를 즐기며, 먹을 것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고귀한 미개인’이라고 부르며 이상화하기도 하지만, 자연현상과 기근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런 집단이 정착 생활을 계속 하려면, 다른 농경민들을 습격해 식량을 얻는 것/ 농업의 집약성과 생산성을 늘리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이 사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기술 혁신에 이점이 있었다. 기술을 혁신한 농경민 집단은 기근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집단은 결국 소멸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아무튼 신기술을 통해 먹고 사는 방법이 개선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잉여가 생겨났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관계에도 바람이 일었다. 새로운 기술은 사람들의 협동 형태를 바꾸었다. 성별 분법이 강화되었고, 음식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한 예로, 5천에서 6천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배수와 관개 공사를 해야만 경작이 가능했고, 창고와 창고 관리자는 사회 위에 군림하면서 사회의 번영을 보장하는 권력처럼 보이게 됐고, 대중의 복종과 찬양을 받았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위상을 갖게 해, 창고는 최초의 신전이 되었고, 창고 관리자는 최초의 사제였다. 그래서 수백년이 지나면서 농경 촌락은 소도시로, 소도시는 우루크, 라가시, 니푸르, 키시, 우르 같은 대도시로 발전했다. 중동과 메소아메리카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문자 발명이 시작되었다. 신전에 귀속된 물품을 모으고 분배한 사제들은 기록하기 위해 문자를 만들어냈다. 또 신전 관리자들은 밤하늘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달과 행성과 별의 운동을 태양의 운동과 연계하기 시작하면서 수학, 천문학, 점성술 등 학문이 탄생했다. 곡식창고에 잉여가 축적되면서, 우리가 문명의 기준으로 간주하는 문화적 진보가 일어날 수 있는 실질적인 토대가 생겨났다. 그렇지만 소도시와 대도시의 형성, 그리고 흔히 만자 발명으로 이어진 과정은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시작되었다. 농업이 어느 한계를 넘어 발전했을 때 작동하는 사회의 내적 동학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에 먼저 도달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다는 주장은 개소리다. 


1-3.최초의 계급 분화

 문명의 발전에는 대가가 따랐다. 문자가 나타나며, 노예를 뜻하는 단어들이 목격되었다. 문명의 출현을 인류 역사의 위대한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디든 문명이 출현한 곳에서는 다른 부정적인 변화도 함께 일어났다. 처음으로 계급분화가 일어났고, 특권을 쥔 소수가 다른 모든 사람의 노동에 기생하기 시작했으며, 소수의 사회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병사와 비밀경찰로 이루어진 무장한 사람들의 집단이 설립되었다. 노예제는 분명 그러한 근거의 일부로, 착취의 규모는 더욱 커져서 엄청난 수준에 달했다. 이는 메소아메리카도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착취한 적 없는 이 사회가 왜 갑자기 변했을까? 초기 농경 사회는 인간 본성이 자동으로 착취와 억압을 낳지 않았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설명하고자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작용을 강조했다.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방식을 개발하며, 새로운 생산방식은 이전의 물질적 어려움을 덜어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방식은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기 시작해, 특정 시점에 이르면 새로운 사회관계를 수용하든지 새로운 생계방식을 버려야 한다. 이런 생계방식의 변화 중 일부 때문에 계급이 출현했다. 새로운 생산방식을 채택한 집단들은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의 잉여를 생산하고 저장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대로 하려면 일부 사람들은 밭에서 직접 일하는 부담에서 벗어나 집단의 활동을 조정하고 잉여의 일부를 당장 소비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창고에 비축하는 일을 전담해야 한다. 생산 조건은 여전히 불확실했고, 그래서 지도자는 지배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자원을 통제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된다고 봤다. 그 때문에 자신들의 통제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고, 그리고 이들은 기아와 가난이 주기적으로 인구 전체를 괴롭힐 때조차 자신들만큼은 배부르고 건강해야 사회가 진보한다고 믿어, 마치 자신들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이익인 양 행동했다. 즉, 사회 발전의 결과로 타인을 착취하고 억압할 동기가 처음으로 생겨난 것이다. 잉여는 생산방식의 도입과 계급 분화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최초의 농경 사회는 계급 분화를 수반하지 않았지만, 더 열악한 조건에 처하게 됐고, 그런 상황에서 생존하려면 사회관계를 재편해야 했다. 

 보통 계급 사회를 사유재산에 기반을 둔 사회라고 생각하나,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이 계급으로 나뉜 모든 사회의 특징이었던 것은 아니다. 칼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아시아적 형태의 계급 사회를 언급하며 지배자들이 토지를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공동으로 경작한 농촌 주민 전체를 착취할 수 있었다. 이는 신전을 운영한 사제들과 왕을 필두로 한 궁정의 행정관리들도 마찬가지로 지휘함으로써 잉여를 손에 넣었지만, 사적인 지배나 소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배 계급 집단의 일부로서만 계급 착취의 이득을 누릴 수 있었다. 이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몇백년 동안 지배 계급 내부에서 심각한 분열이 있었고,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 사이에서 유혈낭자한 전쟁과 심각한 투쟁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지배 계급과 농민들 사이에서 사유재산이 발전했다.      


1-4.여성 억압     

사회가 계급으로 양극화되고, 국가가 출현하자 셰계 모든 곳의 여성은 패배를 당했고,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부른 지위 변화가 여성에게 일어났다. 남성과 함께 공동의 결정권자였던 여성은 이제 의존적이고 종속적인 지위로 밀려났다. 종속의 정확한 성껵은 계급사회마다, 그리고 각 계급 사회에서 여성이 속한 계급마다 매우 달랐다. 그러나 어느 계급 사회나 여성 억압이 존재했고, 그리하여 여성 억압은 어늘날에도 인간 본성으로 취급되었지만 잉여 생산과 함께 사람들 사이에 나타난 새로운 관계가 여성의 지위 변화의 원인이었다. 새로운 집약적 생산 기술 때문에, 남성의 노동은 처음으로 여성의 노동보다 중요해졌고, 수렵-채취 사회에서 중요한 식량 조달 수단이었던 채취는 중요성을 잃어가며, 여성은 곡류 농장물에 대한 독점권과 그에 따른 사회적 지위를 잃었다. 군인 자리도, 원거리 무역도 남성이 독차지했다. 그리고 갈수록 전사와 상인이 잉여를 통제하면서, 소유권과 권력은 남성의 특권이 되었다. 지배 계급 여성은 남성 잉여 관리자의 또 다른 소유물로 전락하면서 성적 쾌락을 제공하거나, 후계자를 생산하는 일종의 장신구처럼 취급되었다. 지배 계끕 여성은 고난과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았지만, 일종의 장신구처럼 취급되었다. 농민 사회의 가족이나 장인 가족에서 여성의 삶은 매우 달랐다. 그 여성들은 여전히 생산에 종사했고 끝없는 고된 노동에 참여했다. 글자 그대로, 가부장제, 즉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아버지의 지배가 존재해 모든 이데올로기와 모든  종교로 확산됐다. 여성 신과 여성 사제는 갈수록 부차적인 구실을 했으며, 창조하고 조직하는 능동적인 존재가 아닌 모성이나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서만 살아남았다. 농민 억압은 귀족 여성 억압과 형태가 매우 달랐고, 노예들의 경우도 억압의 형태가 사뭇달랐다. 그리고 사회마다 여성의 지위는 다르게 나타났는데, 어떤 사회들에서 여성은 재산을 소유 상속받을 수 있었고, 먼저 이혼도 제안할 수 있었다.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가부장제 이론이 함축하고 있는 것과 달리, 여성이 모든 곳에서 억압받았다고 해도 어디서나 똑같은 억압을 받았던 것은 아니나, 분명 원시공산주의 시대보다 열등한 억압을 받았다.      


1-5.첫번째 암흑기

 최초의 문명의 웅장한 건축물들은 자배 계급에게는 자신들의 권력이 해와 별의 움직임만큼이나 영원하고 확고하다는 믿음을 주었을 것이며, 대중에게는더 한층 자기 존재의 하찮음과 무력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라미드와 조각성 그리고 간혹 건축물은 살아남아도, 그것들을 만들어낸 사회는 조만간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그리고 크레타 등등 문명이 붕괴했다. 지배계급이 자신이나 자신의 지배의 기념물에 갈수록 많은 자원을 소비했기 때문, 대중의 생활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도시혁명으로 이어진 초기의 비교적 가난하고 문자가 없었던 공동체들이 이룩한 거대진보를 거대 국가의 확립이 가져온 결과와 비교한 결과 이 시대의 진보)철, 물레방아, 알파벳, 순수 수학)은 문명의 내부가 아니라, 그 주변의 야만 사회에서 이루어졌다. 지배 계끕의 사치가 더해가는 것에 비례해 대중ㅇ은 더욱 착취당했으며, 그에 따라 사회 전체에 생계를 제공하는 기술은 정체했다. 

 최초의 문명에서 일어난 계급투쟁은 이집트 고왕국의 붕괴에서 목격된다. <이푸웨르의 훈계>라는 문서에서는 여종들이 주인 마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관리들이 천한 남자들의 지시에 따라야 하고, 왕족의 아이들을 벽에 내동댕이치는 상황을 상상하고 있다.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붕괴도 농민 반란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갈등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배 계급의 내분도 커졌다는 증거도 있고, 새로운 하위 계급들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농업 생산성 증대로 일부 사람들이 밭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다양한 노동자집단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지배계급의 손에 더 많은 잉여가 집중된 것도 한 가지 요인이 되어 새로운 직업-목수, 목공, 가죽공, 직조공, 금속등 다양한 수공 노동자집단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피라미드를 만드는 사람들-불완전한 자유민-들이 굶주리자 아내들의 지지를 받으며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파업을 벌였다. 그들은 현대적인 의미의 임금노동자는 아니라, 고용주를 선택할 자유가 없었고 현물로 임금을 받았고, 물품 배급으로 생계를 해결했다. 그런데도 이 억압받고 착취받은 계급은 지리적 집중성과 읽고 쓸줄 알았다는 점에서 왕국의 지배자들에게 도전할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는 먼미래의 노동계급 출현이 조짐일 것이다. 대다수 초기 문명들에서는 장인 계급과 더불어 상인 계급도 출현했고, 이미 선사시대부터 무역은 시작되었다. 신흥 지배 계급이 신전과 궁정을 짓는데 쓸 원자재와 사치품을 찾기 위해 무역은 더 중요해졌다. 그러나 대체로 상인 계급은 사회의 주변부 계급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주변부가 성장했을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었다.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상인 계급도 사회를 어떻게 운영할지 독립적인 견해를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계급 발전 수준이 미숙했기 떄문에 사회가 거대한 위기에 빠지면 재조직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힘이나 강령을 지닌 사회집단이 아니다. 농민 대중은 착취자에 맞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수확한 것을 모두 소비했고, 잉여는  전혀 남겨두지 못해 문명이 붕괴했다. 대중은  몇 백년 전 조상들의 순수한 농경 생활로 되돌아갔다.  즉, 마르크스가 말한 도시도 문자도 선진 기술도 없는 사회로 회귀한 것이 당시 농민 대중의 반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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