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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Aug 05. 2023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은 무엇인가》서평

국제 프롤레탈리아 혁명 이론, 앞서간 투사들이 수호하고 발전시킨

 20세기 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세 거인으로는 니체 , 프로이트 그리고 마르크스가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의 영역에, 니체의 생철학은 현대인의 인생관에 유효하다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고 변혁시키려면 당연코 마르크스주의가 유효하다 못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스스로를 본인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엥겔스의 말대로,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는 '마르크스 철학'은 절대 교조적인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행동 지침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 사후 카우츠키에서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겨났지만,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를 표방하지만 교조적으로 해석하거나 수정해서 왜곡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카우츠키류의 교조주의도,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도 아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에 관해 이 책의 저자인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총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계급적 토대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다른 사회주의 정당과 달리 공산당의 고유의 특징으로 두 가지를 뽑았따. 첫 번째는 전체 프롤레탈리아의 공동 이익 추구이고, 두 번째는 언제 어디서나 전체 운동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의 이론이며 국적, 인종, 성별을 불문하고 어느 한 부문이 아닌 노동 계급 전체의 이익을 천명해야 한다. 따라서 특정 나라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계급 전체의 이익을 희생해야 한다는 기회주의와 다르며, 정체성 정치에도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오늘날 여성주의 운운하며 윤석열 캠프에 합류한 신지예를 보면 정체성 정치와 달리 '정체성'이 아닌 계급을 대표하는 이론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정의는 사회적 정의일 뿐 아니라, 역사적 정의이다. 그렇기에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발전시킴에 따라 노동 계급이 성장하고 자본주의를 타도할 잠재력이 인식된 후에야 마르크스주의가 출현될 수 있었다. (이것은 카우츠키와 심지어 초기 레닌의 저작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도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 계급의 저항과 투쟁에 관한 이론인 것만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프롤레탈리아의 승리에 대한 이론으로,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언급했듯  단순히 계급투쟁에 대한 인식을 프롤레탈리아 독재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즉, 노동 계급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국제 노동계급 공동이익에 관한 이론이고, 근대 프롤레탈리아가 탄생하고 그들이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한 결과이며, 무엇보다 노동 계급이 승리를 얻게 하는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는 국제프롤레탈리아 혁명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성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성과 과학성은 양립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두 가지 조류가 있다. 첫째는 특정 사회 집단을 기반으로 한 것이므로, 과학이 될 자격이 없다는 칼 만하임의 주장이고, 두 번째는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므로 프롤레탈리아의 견지에서 도출될 수 없다는 알튀세르식(요즘 느끼는 바로는 프랑스판 진중권)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오해는 먼저 자연과학의 성격에 대한 오해와 다음으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관계에 대한 오해로부터 기인한다. 사람들이 자연과학이 정확하고, 객관적이라며 사회과학의 본보기가 된다고 믿지만, 이러한 관점부터가 사회적 산물이다. 과학을 이루는 것은 점점 늘어나는 현실의 필요들에 자극받아 생겨나, 진리성을 입증하게 되는 상대적, 잠재적인 진리이며 자연과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바슐라르는 코페니쿠스적 전환과 같은 사례를 보면, 뉴턴의 우주관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대체된 것을 보면 인류가 진보할 수로 또 다른 과학의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지식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정립되기에, 자연과학인 경우 인식 대상이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지만 사회과학의 경우 인간 관계들의 총체이기 때문에 인간은 불변의 자연법칙을 따라야만 자연을 변화시킬 수 있지만, 사회법칙은 변경이 가능하다. 후자에 관해서 말하자면 일단 부르주아들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부르지아지들은 자연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관심이 있고 사회 변화가 아닌 현상 유지에 관심있기 때문에 사회적 진실이 아닌 사회적 변론술, 즉 이데올로기에 관심이 있다. (경제학의 한계효용 이론, 다원주의 권력이론) 따라서 늘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곡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익이 되고, 그럴 능력이 되는 것은 노동 계급이며, 이런 계급적 토대는 결코 그것에 과학성을 침범하지 않으며, 그런 토대 덕분에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 말이 곧 프롤레탈리아 투쟁이나 자본주의 사회만 분석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엥겔스가 말한 것처럼, '노동이 인간 자신을 창조했다'는 진리는 인류의 역사에 자유롭게 적용가능하다.


실천에서 이론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정치 원칙과 강령인 것들로 언급되는 것들로는 국제주의와 생산수단 국가 소유가 있다. 국제주의 원칙은 간단하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전체 노동 계급의 이익이 부분(국가나 기업)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자신이 속한 국가의 이익이 아닌 노동 계급 전체의 이익-국익이 된다고 전쟁에 찬동하는 행위가 아닌 민족자결권을 지지해야 한다- 두번째 국가소유 문제에 관해서 국가소유가 사회주의의 기본이라고 오해를 하지만, 이것은 <<공산당 선언>>에서부터 반박되는 오해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해방을 목적으로 두어야지 국유화를 수단으로 보는 것이지 절대 국유화를 사회주의의 충분조건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 전술에 따라 국유화를 지지할 수는 있더라도 국유화를 사회주의라고 보는 것은 국가사회주의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한 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의 토대인 역사유물론에 대해 보면, 헤겔을 물구나무세워 구체적 실천 활동으로 노동을 인간과 역사의 기초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노동을 기반으로 역사유물론 이론은 자본주의의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의 운동법칙을 드러내 보여 노동자 운동에 과학적 토대를 제공해주었으며, 체제가 착취에 바탕을 둔 것을 보여주었기에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는 예측을 포함한다. 특히 소외 이론, 잉여가치론, 공항이론등 그의 독창적인 견해는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처지에서 노동 과정을 분석한 철학자이자, 경제학임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정수가 되는 이론들은 자본에 대항하는 프롤레탈리아의 투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처럼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해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 '프롤레탈리아 혁명'을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 즉,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연결해주는 동앗줄은 프롤레탈리아 혁명에 기여하는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란 마르크스-엥겔스의 뒤를 이은 로자, 레닌, 트로츠키를 주된 대표자로 같으며 그보다 조금 기여가 적은 노동계급의 투사들로 둘러 쌓여있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을 통일하려고 해야 하며, 지혜나 교정된 교의에 만족하지 않고 변화하는 세계에 적용해야 한다. (레닌의 당이론, 로자의 대중파업, 트로츠키의 연속혁명처럼) 따라서 선배들의 성과에 바탕을 두며 계속 쌓아 올려진 것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레닌이 <<좌익소아병 비판>>에서 말 했듯이, '올바른 혁명 이론은 진정으로 대중적이고 진정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실천활동과 긴밀히 연관된 경우에만 최종 형태를 갖춘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마르크스와 레닌 모두 좋아했던 파우스트의 한 구절 "여보게, 이론이란 모두 회색빛일세. 푸른 건 인생의 황금나무지"를 떠올리게 한다.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회색빛 이론을 푸르게 피워내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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