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치료 78일.
며칠 전 나는 원래 복용하던 약 "노르작 캡슐 10mg+에스벤 서방정 50mg" 에서 노르작 캡슐을 10mg 더 올려 20mg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나의 뇌는 세로토닌이 정말 조금 부족했는지 식욕이 없는 것 말고는 큰 부작용 없이 괜찮은 기분을 유지시켜주고 있다. 이 괜찮은 기분이라는 게 참 재밌다. 우울하지도 방방 뜨지도 않는 ‘0’ 근사치로 맞춰진 느낌이다. 그래서 슬픈 일 엔 슬플 수 있고 , 기쁜 일엔 기쁠 수 있다. 깊숙한 어둠이 사라진 그런 기분이다.
나는 ‘한놈만 패기’라는 고약한 편독 습관이 있다. 한 분야에 꽂히면 집중적으로 그 주제에 얽힌 것들만 읽기 시작하는데 최근에는 우울증 관련 서적을 때리고 또 때리는 중이다. 우울증이 한창일 땐 책을 두장이상 읽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집중력이 어느정도 돌아와서 글을 적고 읽기가 수월해졌다.
요즘의 즐거움은 전기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갔다가 원하는 책들을 잔뜩 빌려오는 것이다. 도움되는 건 깊이 파고 , 아닌 건 그냥 훌훌 넘기며 본다. 이번 3주간 읽을 책들인데 또 얼마나 내 삶에 도움이 될지 벌써부터 기쁘다.
여하튼 ,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의 뇌는 우울과 불안의 하강 나선에 더 쉽게 빠지는 취약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겉보기로는 그런 성향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힘든 일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높다고 생각하지요. 맞습니다. 실직하거나 배우자를 잃는 일과 같은 부정적인 사건이 사람을 우울증에 빠뜨릴 수 있어요. 그런가 하면 대학에 들어가거나 은퇴하거나 낯선 도시로 이사하는 것처럼 삶에 닥친 큰 변화도 우울증을 초래할 수 있고요.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우울증이 외부 상황보다는 뇌의 작용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입니다.
당신은 완벽주의자인가요?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스스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잘 알아차리는 편인가요, 아니면 감정을 깊이 억누르는 편인가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게 어려운가요? 당신이 느끼는 감정에, 심지어 긍정적인 감정에도 압도되는 느낌을 받나요? 비현실적일 정도로 낙관적인가요, 아니면 비관적인 마음 때문에 의욕을 내기가 어려운가요? 이런 특징들은 뇌 회로의 미묘한 차이 때문에 생기며, 뇌가 우울의 하강 나선에 갇힐 위험을 높일 수 있습니다.
우울증의 뿌리는 생물학적인 것입니다. 그냥 마음먹는다고 단숨에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만약 당신이 우울한 상태에서 그냥 빠져나올 수 있다면, 그것은 우울증의 정의에 부합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한번 해볼까요? 그냥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세요!빠져나왔나요? 그렇다면 정말 잘됐군요! 당신은 여기서 이 책을 그만 덮어도 됩니다
<우울할 땐 뇌과학, 실천할 땐 워크북 발췌>
뇌는 우울한 감정을 더 편안해한다는 이야기를 봤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의 하강 나선에 한번 갇히면 어지간해서 나오기 힘들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뇌는 우울감에 좀 취약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취약한 나의 뇌를 그대로 두기엔 내가 살아가야 할 날이 너무나 많다. 나는 고작 30대이고 적어도 40년 정도는 더 살 예정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나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순간이라 생각이 된다.
대부분의 우울증과 마음에 대한 서적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알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나’
참 어색하고 낯설고 간지러운 말이다. 윤홍균 선생님의 자존감 수업에서 나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는 아는 만큼 더 사랑할 수 있으니 나의 장단점을 적어보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관심에서 시작된다며 나에게 관심을 가지라 했다. 그러나 내가 못 적겠음 타인에게라도 물어보라길래 냉큼 신랑에게 물었다
나 : 오빠 내 장점이 뭐야?
오빠 : (설거지 중)..? 응? 장점?
나 : ㅇㅇ 장점. 내 장점이 뭐야?
오빠 : (한참 고민) 음..
한참 고민하다가 쥐어짜듯 2개를 내어놨다. 5개만 좀 채우자고하니 너무 어려워한다. 어찌나 어려워했는지 앞에 있던 6살 아들이 “엄마는 요리를 잘해!”라고 대신 답해줬다.
(요리를 잘한다는 말에 신랑이 '비'웃은 건 비밀 ㅋㅋㅋ)
나 : 그래 그럼 오빠 내 단점이 뭐야?
오빠 : 아침잠이 많아, 게을러, 도전을 잘 못해, 끈기가 없어
???????????????
이렇게 속사포로 나온다고????
???? 응?ㅋㅋㅋㅋㅋㅋㅋ
참나 기가 막혀서.
그럼에도 이쁘다 이쁘다 날 사랑해준 신랑에게 큰절이라도 해야 할 판.. 나의 단점들을 곱씹다 보니 어쩌면 우울증의 증상이었겠구나 싶었다.
우울증의 증상
미국 정신의학회의 정신장애 진단 통계 편람(DSM)의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다음의 증상 중 5가지 이상의 동일한 증상이 2주일 이상 나타나야 한다:
1.'우울한 기분' 또는 '흥미 또는 즐거움의 상실' 중 하나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아동 및 청소년의 경우 과민함으로 대체될 수 있다.
2. 하루의 대부분, 그리고 거의 매일 지속되는 우울한 기분
3. 거의 모든 일상 활동에 대한 흥미나 즐거움이 하루의 대부분 또는 거의 매일 현저히 감소
4. 식이 조절을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체중 감소 또는 증가가 나타남. 또는 거의 매일 식욕의 감소 또는 증가가 보임
5. 거의 매일 불면 또는 과수면
6. 거의 매일 정신 운동 흥분 또는 지체
7. 거의 매일 피로 또는 에너지 상실
8. 거의 매일 단순한 자기 비난이나 아픈 데 대한 죄책이 아닌 무가치감 또는 과도하고 부적절한 죄책이 보임
9. 거의 매일 사고와 집중력의 감소, 결정 곤란을 보임
10. 죽음에 대한 반복적인 생각, 구체적 계획이 없는 반복적인 자살 사고 또는 시도나 자살을 시도하려는 상세한 계획
우울장애의 진단은 정신과 의사의 임상경험, 임상 면접, 심리검사 결과, 진료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이 기준에 부합해도 증상이 2주일 이상은 지속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혹은 비교적 약한 증상을 몇 년 이상 겪고 있을 수도 있다. 이는 경증 우울장애나 만성 우울장애(2년 이상) 일 수 있다
나는 이중 9개의 증상이 근래 계속 있었다. 그러나 그냥 내 성격이거니 하고 살았던 건 아마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고 사람들에게 나갈 땐 (+출근)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여 이런 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에서 나의 민낯을 마주하는 신랑은 나의 이상한 부분들을 먼저 캐치했으리라.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은 뇌가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전이 힘들고 활동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진다는 것이었는데 ,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아침이 힘들었다. 물에 젖은 이불처럼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고 정신이 맑아지는데도 한참 걸려 미라클 모닝은 둘째고 “굿모닝!!! 으라차차 힘찬 하루!!!!”라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잠이 별로 없고 부지런한 신랑 입장에선 내가 아침잠이 많고 , 게으른 걸로 보일 수밖에.
더불어 모든 의욕이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무언가를 도전할 수 있겠으며 (약간의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원래도 시작 자체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편인데 거기에 의욕까지 없었으니 말해 뭐해) , 설령 큰맘 먹고 시작했어도 금새 의욕이 사라지고 심한 정신적 피로감에 끝까지 유지하기가 어려워 당연스레 끈기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별로라고 생각했던 나의 모습은 우울증이 곱게 만들어준 모습이 아닐까 싶다. 약을 증량하고는 최근의 아침은 좀 괜찮았다.
2022. 06. 14 화요일, 오전 8시, 스타벅스
아침에 6시에 눈을 떴다. 전날 12시 넘어 잤기 때문에 매우 이른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눈을 떴는데 그저 잠을 더 자고 싶다는 생각만이 있고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더 이상 물에 젖은 목화 요가 날 짓누르는 느낌이 없었다. 분명히 나는 잠을 적게 자서 피곤하고 더 자고 싶은 상태였음에도 말이다. 정말 이상하다. 정말 “굿모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하나? 이런 정도면 정말 미라클 모닝도 가능할 것 같다. 날씨가 너무 좋다. 바람이 선선하고 하늘이 맑다. 아침을 대충 내어주고 신랑에게 아이들을 챙겨달라 이야기하곤 전기자전거를 빌려서 페달을 밟았다. 진짜 굿모닝이다. 상쾌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들었다. 아침 공기가 이렇게 맑을 수 있나.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침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런 기분으로 아침을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이다. 정신이 깨었고 머릿속도 하늘만큼 맑다. 뭐 할까? 하다가 스타벅스에 들어왔고 글을 적어 내려 간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다. 왠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니 혹여나 이 글을 보고 있는 우울증을 지니고 있는 분들께선.. 생각보다 본인이 그렇게 별로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어쩌면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지만 다만 지금은 뇌호르몬의 농락에 본인을 오해하고 있는 것임을 기억하고 너무 본인을 미워하지 않으셨음 좋겠다. 우울증이 나아지면서 분명 단점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조금씩 개선될 것이다. 마치 내가 오랫동안 묵혀놨던 집 청소를 시작하고 아침에 러닝을 하고 자전거를 탔던 것처럼.
혹시 우울해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비난하거나 몰아세우지는 않았나요? 우울한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심지어 당신 뇌의 잘못도 아니죠. 잘못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울증에 원인을 제공하는 수많은 요인이 있을 뿐입니다. 우울증이 당신 잘못은 아니지만 당신이 해결책의 일부가 될 수는 있어요. 변화의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우울할 땐 뇌 과학, 실천할 땐 워크북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