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무엇이 되기 위해 이리도 게으른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라. 이것이 진정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이의 모습인가? 꿈도 열정도 모두 아서라.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도 벅참에 분명하다.
말라가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지난밤 늦게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숙소 체크인을 하고는 바로 뻗어버렸다. 느지막이 일어나 거리로 나와 근처 카페에 앉아 커피에 빵을 물고 있으니 바깥 유리창 위로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빗방울이 날카롭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여행 10일 만에 처음이었다.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날엔 여행을 하기 쉽지 않은데, 급하게 계획을 변경했다.
혹시 몰라 챙겨 온 우산을 꺼내 들고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거대한 대성당의 위용은 말할 것도 없었으나 그보다 눈에 확연히 들어온 것은 그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이었다. 빗소리에 바이올린 소리가 더해지면서 쉽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만들어졌다. 이런 날엔 빗방울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약 10년 전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했던 당시에도 많은 버스킹 연주자들을 보며 가슴속에 막연히 품었던 꿈이 하나 있었다. 바이올린 하나만 들고 버스킹을 하며 여행하는 것. 그 목표를 잊지 않고 틈틈이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지만 나도 모르게 차츰, 모든 것이 그렇듯이 물에 풀어진 물감처럼 꿈들이 현실에 용해되고 풀어지며 그 빛을 잃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인생의 모든 것이 꼭 그런 식이었다.
여행자가 비 오는 날 가질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걸 증명하듯이 피카소 미술관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다들 비에 젖은 우산을 들고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 서로 간의 습도를 높이는 한편 얼른 에어컨 바람 아래로 이동해 불쾌지수를 덜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에도 사전 예매를 하지 않은 나는 습도를 좀 더 견뎌가며 줄을 서고 기획 전시와 상설 전시를 모두 볼 수 있는 통합권 티켓을 샀다.
기획전시는 기대 이상이었고, 상설전시는 기대 이하였으니 전시는 대체로 그 중간 어디쯤 괜찮은 전시의 모양새가 되었다. 먼저 Daniel-Henry Kahnweiler의 수집품을 구획별로 전시한 기획전시를 둘러봤다. 피카소 이외에도 이전에 알지 못했던 작가들의 수준 높은 작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이를 통해 새로운 큐비즘의 면모를 발견하고 감탄할 수 있었다. 나는 어느 새부터인가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도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한 사람들을 보며 ‘그래, 저 사람도 잊혔는데’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기획 전시를 보면서도 역시나 그런 말들을 되뇌었다.
반면 상설전시는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은 많지 않았으며 초기 작품과 회화 이외의 작품이 많아 기대감을 충족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다작 능력은 그 와중에도 눈에 띄었다. 그가 평생 동안 만든 작품의 수를 그의 생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하루 평균 1.5개의 작품을 생산해 낸 셈이라고 한다. 이미 15살에 완벽한 사실주의 기법을 터득했고 그만큼 정석에 정통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선 자신만의 양식과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사람이 이렇게 유명해지면 부담감 때문에라도 작품 활동을 멈추거나 돈 벌 필요를 못 느껴 느긋하게 작품 활동을 할 수도 있는 건데 그에게는 그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그런 걸 가지기 이전에 그림 자체를 하나의 놀이로써 즐겼구나.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의 작은 웅얼거림이 생겼다. 피카소도 이렇게 다작하는 노력파인데, 나는 뭘 믿고 이렇게 시들어가고 있을까.
기억 속의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다. 언어 공부를 좋아해서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게 목표였던 적도 있고, 패러글라이딩의 매력에 빠져서 강사를 꿈 꾸기도 했다. 커피를 좋아해서 바리스타가 되거나 카페를 차리는 상상도 많이 했고, 옷을 좋아해서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난리를 친 적도 있다. 내 하루는 48시간이었으면, 혹은 몸이 2개나 3개쯤은 됐으면, 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러다 어느 날 멈췄다.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던 순간이 찾아왔고, 최대한 단순한 삶을 편안하게 살자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노력해도 내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남들만큼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날, 그럴듯한 직업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 그것부터 갖춰야 한다고 다짐했던 날. 그런 날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됐다.
반성해야 하는 시점인가. 미술관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을 고민했다. 그간의 내 삶의 태도가 너무 수동적이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사는 방식이 좋았는지, 불가피했을 뿐 이제 상황이 나아졌으니 다시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하는 시점은 아닌지.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 삶의 방향에 정답은 없겠지만 이게 과연 내가 원하는 방향이 맞는지는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다시 바깥을 나섰다.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고, 오전보다 바람이 거세졌다. 상점들은 일찍 문을 닫았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근처 케밥집에 들러 어제부터 아른거렸던 케밥을 또 먹고, 숙소 근처 슈퍼마켓에 들려 레몬 맥주와 과자를 조금 사서 숙소로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젖은 옷을 옷걸이에 걸어 말려두고 방 한편에 있는 소파에 앉아 수첩과 펜을 잡았다. 돌아가면 하고 싶은 일. 1번부터 4번까지 차근히 써 내려갔다.
피카소의 삶이 준 충격이 이끌어낸 변화이자 그간 오랫동안 원했던 자극이기도 했다. 잃어버렸던 삶의 활력을 되찾아 다시 하고 싶었던 일들을 차근차근히 이루어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삶은 오직 한 번만 주어진 것일 테니까, 어느 날 문득 오늘과 같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내 인생에게 진솔한 태도로 살아가고 싶다. 적어도 과거와 타인을 빌미로 내 삶에 핑계를 두르고 변명하는 시간은 이제 끝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