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이었다. 평생을 미워하다가도 어느 날엔 용서를 떠올렸다. 가족이란 핏줄로 묶어낸 천형에 다르지 않았음을, 누구를 원망해야 좋을지 모른 채로 끝없이 그 결속을 속죄해야 했다.
오전 10시가 지날 무렵 체크아웃을 하고 그라나다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오늘은 말라가를 거쳐 바르셀로나로 이동해야 하는 날이었는데, 원래라면 새벽같이 일어나 7시에는 버스를 타고 느긋하게 말가라를 돌아볼 예정이었으나 지친 몸은 더 이상의 빡빡한 일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 5시간 보나 7시간을 보나. 안온한 심신을 갖추고 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이 미쳤다.
그라나다에서 기차를 타고 바르셀로나로 갈 수도 있었지만 말라가에 있는 퐁피두 센터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들르기로 했다. 시외버스에 올라타 약 2시간가량을 이동하고 나니 말라가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고, 터미널에 있는 코인로커에 캐리어를 맡긴 다음 배를 채우러 향했다. 말라가는 그라나다와 비교할 수 없이 따뜻했다. 햇볕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져 여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터미널 맞은편에 위치한 케밥집의 냄새가 좋았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케밥이 먹고 싶었던 터라 크게 고민하지 않고 들어가 추천 메뉴 중 하나를 고르고 자리를 잡았다. 터키 사람인지 모를 직원은 유난히 친근했고, 케밥도 맛있었다. 가격 대비 이 정도 양과 맛이라니, 다시 한번 케밥에 반하는 순간이었다. 곁가지로 나온 감자튀김 역시 뛰어나서 혼자서 계속 감자튀김에서 HOLY한 소리가 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얻은 케밥의 힘으로 말라가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약 20분 정도를 걷다 보니 해변이 나왔고 주차되어 있는 요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야자수가 곳곳에 무성하게 자라 있는 풍경이 꽤 낯설었으나 과연 스페인 사람들이 휴양하러 오는 도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퐁피두 센터 앞까지 금방 도착했으나 미술관을 둘러보기에는 시간이 애매해 해변가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렸고 고개를 내려 확인해 보니 아빠였다. 오늘도 뭐라고 하겠구먼.
아빠는 내가 리스본에 도착해서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시차를 가장 먼저 확인했다. 거기가 저녁일 때 여기가 대충 아침이라고 얘기한 후로 그는 매일 밤마다 내게 전화를 걸어 생사를 확인했다. 유난히 걱정을 많이 했다. 이보다 더 어릴 때 유럽 여행을 더 길게 했고, 해외에서 1년 가까이 살기도 한 딸을 무슨 연유에서 이렇게까지 걱정하는지 몰랐으나 아빠는 계속해서 오늘은 어땠는지, 위험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오늘도 혼자인지를 물었다.
내심 걸리는 모양이었다. 혼자서 여행을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혼자 하는 여행이 더 재밌고 좋은 면이 많다고 여러 차례 어필을 했으나 그는 말로는 그래? 하고 되물으면서도 영 믿지 않는 눈치였다. 또 혼자야? 하는 말을 며칠에 걸쳐 듣다 보니 이제는 거짓말로 누구와 함께 있다고 말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아빠, 나는 나와 여행해. 그리고 정말로 그게 나쁘지 않아. 좀 믿어주라.
어렸을 땐 신이 내게 와서 가장 필요한 것 하나만 주겠다고 물으면 안온한 가정이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집에 들어가면 따뜻하게 맞아주는 가족들. 시시콜콜하게 하루 일과를 나누고 TV를 보면서 누가 어쨌네 저쨌네 무용한 대화도 나누고, 반찬 투정을 하고 외식 메뉴를 고민하고, 나가서 고기를 구워 먹고 돌아와 다 같이 땅땅 거리며 배를 두드리는 가족들. 가끔 여행을 계획하고 실제로 떠나 추억을 쌓고 돌아와 몇 달을 그 여행에서 쌓은 에피소드를 사골 국 곪아 먹듯이 곪아 먹으며 살 수 있는 적당히 따뜻하고 편안한 가정 말이다.
그런 걸 갖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 한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던데, 평생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 속에서 살아간다던데. 우리는 다 같이 그 구멍을 만든 걸까? 나뿐만 아니라 엄마나 아빠에게도 그런 구멍이 생겼을까? 어쨌거나 최초의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내게 안온한 가정은 없었으며, 학창 시절 내내 그걸 가진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것만이 내 몫이었다. 아빠는, 개망나니였으니까. 다시는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시절도 있었다.
시간은 과연 많은 걸 해결해 주는 듯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다시 아빠를 만나기 시작했다. 연례행사처럼,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다 해내는 사람이 되어 느슨한 끈으로 묶어놓은 가족이 되었다. 그 사이 아빠는 많이 변해 ‘우리 딸 최고야’ 같은 낯간지러운 말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문제는 내가 그걸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딸은 아니라는데 있었지만 말이다.
잠 못 드는 밤이면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별 것도 아닌 노래들을 돌려가며 용서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보다 누구를 용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게 있나. 누구는 왜, 무엇 때문에 용서할 수 있으며 누구는 그럴 수 없나. 애초에 내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있기나 하나? 이 관계는 쉽게 설명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이 복잡하기만 했다. 어찌 보면 가족이라는 관계가 다 그런 식이었다.
해변 근처에는 플리 마켓이 열려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이를 오갔는데, 유난히 아빠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딸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단언컨대 내게 저런 어린 시절의 추억은 없다. 아빠를 두려워한 기억, 심장이 멈춘 것 같이 커다란 공포에 질렸던 기억, 그런 건 있어도 한가롭게 목마를 타거나 손을 잡거나 아빠를 향해 뛰어간 기억은 없다. 그런 게 없어도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며 여전히 그를 인정할 수 있을까.
인정을 하건, 하지 않건 그는 내게 있어 어엿한 아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오히려 내 마음속에 더욱 커다란 구멍을 뚫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인정하기 싫으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까마득하게 다가오다가도 그거 하나 뭐가 어렵나 싶어 어느 날에 평화로운 부녀관계처럼 지내는 현실에 만족하기도 한다. 천형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전생에 서로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준 관계가 분명하다고. 이번 생애에서 이를 껴안는 게 나의 몫일 거라고.
이 여행이 그렇듯 삶은 계속되기에 이 관계를 지속하는 법을 강구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혼자가 좋다는 딸과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 사이의 간극이 작지 않다. 그래도 어쩌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 수 있는 시간이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시간이 오히려 그 간극을 넓힐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빠를 평생 용서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아빠는 그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리지조차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계속해보는 수밖에. 그 끝에 어떤 결과지를 받아 들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저 꾸준히, 묵묵히, 이 삶을 살아내고 여행을 계속하는 수밖에. 그 끝이 평온이건 불안이건 그런 것은 사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고, 홀로 중얼거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