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에 전율이 흐르다니 말이야. 온 세상이 맞춰 진동하던 순간의 그 일을,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에도 새삼스럽게 떠올리며 그리워하다니. 겨우 잠깐의 눈인사였을 뿐인데. 참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지난 며칠 동안 다소 피로해진 몸 상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드디어 오늘, 세비야에서 그라나다까지 이동하면서 중간에 있는 도시들을 둘러보는 센딩 투어(Sending tour)를 하며 지친 발과 다리를 쉬게 해 줄 수 있는 날이 왔다. 이 방의 부지런한 한국인들은 오늘도 아침 8시가 되기도 전에 일찌감치 침대 위를 비웠다. 투어를 신청한 나보다도 이른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라니, 의식하지 말자고 얘기하긴 했어도 여전히 의식될 수밖에 없이 부지런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열정과 체력은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달라고 외쳤던 지난날의 내가 다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나만의 여행 방법이 있는 법. 천천히 짐을 정리한 뒤 가만히 앉아 창 밖을 응시하다가 약속된 시간 5분 전에 맞춰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업체를 통해서 예약했고, 한국인 가이드가 숙소 바로 근처까지 차를 끌고 와서 나를 픽업할 예정이었다. 이른 아침의 세비야 풍경은 깨끗했다. 도로가 투박한 돌길로 이루어진 도시를, 그것도 이름 모를 관광객들이 휩쓸고 다니는 거리를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다니. 누군가는 밤새 도시 위를 춤추듯 오가며 쓸고 닦았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위아래로 흔들렸다.
멀리 시선을 던져 길을 살피고 있으니 은색 빛의 커다란 SUV 차량이 바로 앞에 섰다. 혼자 있는 한국인을 알아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바로 이 차겠구나 싶어 운전석에서 내리는 사람을 향해 준비된 인사를 했다. 가이드는 내 짐을 실어주며 혼자니까 앞에 타라고 조수석을 권했다. 아무래도 이 근방에서 조수석을 나만큼 좋아하는 사람을 찾긴 힘들겠지,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차 위로 올라탔다. 나는, 그러니까 지난 야간버스를 탔을 때도 일부러 20유로를 추가해서라도 맨 앞자리에 탄 사람이라고.
타고 보니 오늘 하루 종일 함께 할 사람들이 보였다. 한 팀은 친구분들끼리 여행을 오신 걸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분들 넷, 다른 한 팀은 엄마와 딸 둘, 그리고 나 이렇게 총 7명이었다. 가이드는 이렇게 7명이 모두 여성일 줄은 몰랐다고 웃었으나 이 상황이 아직 어색한 나머지 7명은 크게 웃지도 그렇다고 반박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풍선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다가 멀리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마저도 차가 곧 고속도로로 진입하자 잠이 곧 그 어색함을 이겨버리고 다들 고개를 떨구며 고요해졌다.
우리는 3개의 도시를 거쳐 종착지인 그라나다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각 도시는 순서대로 론다, 프리힐리아나, 네르하였다. 세비야를 떠나서 드넓은 평야 위를 숨 쉬는 수많은 올리브와 오렌지를 바라보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 론다 도착을 코 앞에 두고 있었다. 잠들었던 사람들도 곧 론다에 도착할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하기 바빴다. 세상은 참 넓어, 어떻게 이런 곳이 다 있을 수가 있지? 한 아주머니께서 외쳤고 그 옆에서 이 소녀 감성을 어쩌면 좋냐고 호탕하게 웃어 젖히는 친구분들이 있었다. 나도 그 소녀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 쪽이긴 했다.
우리는 론다에 내리자마자 가장 유명하다는 누에보 다리를 둘러보고 그 아래로 내려가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시간이 다가왔고 가이드는 몇 군데 괜찮은 식당을 추천해 주며 2시간가량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나는 누에보 다리에서 돌아 나와 홀로 떨어져 식당이 밀집해 있는 구역으로 이동했다. 차는 이동할 수도 없이 좁은 도로 곳곳을 식당의 외부 테이블이 점령하고 있었고, 웬만큼 유명하다는 식당들은 이미 관광객들이 자리를 점하고 있어서 들어가기가 어려워 보였다.
사실 애초에 그런 식당은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시끌벅적하고 요란한 곳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가는 나도 모르게 마음 어딘가에 상처 입고 돌아오길 뻔했다. 혼자 먹는 밥, 그래 아직은 어려울 지도 모르지, 중얼거리며 주변을 조금 더 걸었다. 그러다 VICTORIA라는 글씨가 빨갛게 쓰여 있는 카페가 보였고 야외 테이블에 자리도 곳곳에 비어 있길래 얼른 가게 문 앞에 서 있던 직원에게 눈인사를 하고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건네받은 메뉴판에는 이곳이 꽤 맛있는 추로스를 판매하는 곳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었고,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똬리를 튼 뱀같이 돌돌 말린 추로스 하나씩을 찢어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민하지 않고 추로스와 핫초코, 그리고 라테 한잔을 시켰다. 그리고도 부족할 것 같아서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도 주문했다. 직원은 만족한 듯 웃으며 메뉴판을 가져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금 만든 따끈하다 못해 뜨거운 추로스가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배가 고팠던 탓에 뜨거움을 이겨가며 맛있게 추로스를 먹고 라테를 들이켜고 있자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추로스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름 그들의 시선까지 즐기며 마저 샌드위치 반쪽을 먹고 있으니 백발의 한 중년 여성분이 거리에 서서 추로스와 내가 먹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옆,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내가 먹는 메뉴를 가리키며 직원에게 주문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주문한 추로스가 나오고 그는 손으로 추로스를 주욱 찢어 핫초코에 한번 담근 후 곧바로 그의 입으로 집어넣었다. 곧이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내게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내렸다. 나는 몰래 훔쳐보다 걸린 사람처럼 꽤나 당황했으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최대한 자연스레 웃어 보였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식사에 집중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그 순간이 슬로 모션처럼 느껴지면서 그의 등 뒤로 빛나는 햇볕이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눈 부셨다.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도 같은 동성끼리, 잠깐의 눈 맞춤으로 이렇게까지 잊지 못할 순간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우리 인간들 사이에는 정말 외계인은 낄 수 없는 그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과 호르몬의 공간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 날의 떨림을. 그리고 같이 붙어 다니는 여자들의 생리가 옮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에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누건,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 하건 정작 남는 것은 서로 간의 알 수 없는 감정을 전달하는 이 눈빛뿐이지 않을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한 순간의 짧은 불꽃으로 요약되곤 하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말이다. 가끔 인생에서 알 수 없는 순간의 결정이 모든 것을 바꾼 날에는 그와 나눴던 순간의 절묘함을 떠올리기로 했다.
짧은 식사를 마치고도 시간이 남아 론다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시끌벅적했던 공간에서 벗어나 한적한 걷고 있으니 새삼 작은 도시가 가진 매력이 느껴졌다. 그 위를 오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저림과 숱한 설렘들을 세고 있으니 내가 살아보지 못한 과거, 또 어떤 미래, 그 알 수 없는 순간들이 부러워졌다. 왜 우리에게는 오직 단 하나의 삶만이 주어진 것일까. 항상 궁금했다. 어떤 이와 또 다른 이의 삶을 살아보지 못하는 이 삶이 어쩐지 형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작 가장 알고 싶은 것은 결코 알 수 없는 삶 말이다.
다시 투우장 쪽으로 이동하니 투어 사람들이 이미 SUV 차량 앞에 삼삼오오 모여 사탕을 나눠 먹고 있었다. 입가심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멀리서 걸어오는 나를 보며 환희 웃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처럼 우리는 아침보다 훨씬 반갑게 서로에게 손짓하고 눈짓했다. 식사는 맛있게 먹었는지 서로 물으며 각자의 손에 사탕 두 알씩을 나눠 받았다. 삶이란 희한한 것이구나. 매일 보는 사람들에게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난생처음 보는, 그러나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얻고 사는구나. 그들이 건네준 사탕 중 한 알을 가이드에게 건네며 우리는 서로 웃어 보였다. 남은 하루도 잘 부탁한다며, 같이 좋은 하루를 보내 보자며 말이다.
다시 2시간가량을 이동해서 도착한 프리힐리아나와 그 아랫동네인 네르하 모두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다 함께 나란히 걸으며 이 도시가 갖춘 아픔을 나누기도 하고 높이 올라가서 마주하는 멋진 전망에 입을 모아 탄성을 내뱉기도 했다. 오늘 보고 말 사이겠지만 즐거운 한 때를, 좋은 순간들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했다. 그렇게 네르하의 일몰을 뒤로하고 그라나다로 도착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진심을 담은 안녕을 빌며 헤어졌다. 서로의 앞날에 더 좋은 순간들이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