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연민의 늪은 곧 숲이 되고

by 이재리

이 밤을 모두 덮고 나면 더 이상 불쌍한 나는 보이지 않겠지. 그렇게 나를 감출 생각이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더 안타까워지기만 하는 게 내 인생이라.



그라나다는 일정 중 유일하게 1인실 호텔을 예약한 도시였다. 과거의 내가 생각했을 때도 이쯤 되면 체력이 많이 떨어져 홀로 푹 쉴 수 있는 시간일 필요할 것이라 계산했던 것 같다. 칭찬해 줄 만하군, 과거의 나 자신. 간밤에 길 건너편에 있는 까르푸라는 마트에 들러 요거트와 과일, 맥주, 과자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 와서 반신욕을 거하게 즐긴 후 침대 위에서 이것저것 까먹다 잠들고 일어났다. 무려 11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자고 일어났으므로 그 어느 때보다 배가 고팠다.


근처 한 레스토랑에서 맛있어 보이는 연어 스테이크를 팔고 있는 걸 발견했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나가 점심시간이 시작될 무렵 식당 테라스에 앉아 연어 스테이크와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이제서야 그라나다라는 도시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중세적인 모습을 많이 갖춘 도시로 알려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오늘이 일요일이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평화로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좀 더 느긋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맛도 아니었던 연어 스테이크. 우우!

연어 스테이크는 기대 이하였고,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 실망감을 채우기 위해 근처 커피 전문점에 들렀고 카라멜 마키아토 아이스를 주문하며 카라멜 드리즐을 추가해 버렸다. 사실 내가 주문한 건 아이스 라테에 카라멜 드리즐만 추가한 커피였는데, 소통 상에 오류가 있었는지 직원은 카라멜 시럽을 컵 아래 이미 깐 채로 커피를 만들고 그 위에 추가적으로 드리즐을 뿌려줬다. 원했던 것 이상을 단 커피를 들고 숙소에 들어와 누웠다. 알함브라 성 입장 시간은 3시 반이었고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 안의 정원

그라나다에 온 유일한 이유는 알함브라 성이었다. 딱히 와야만 했던 이유는 없었고, 그저 보고 싶었다. 아주 오래된 성이 세월을 굳건히 이겨내고 그 자리에 서서 서서히 낡아가는 모습이. 그것도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나름의 물음에 답하고 싶었다. 2시가 넘어 성으로 출발했다. 시내에 있는 수많은 인파를 뚫고 성 근처로 향하니, 엄청난 오르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걸어가는 게 유일한 방법인가, 고민하며 걷다 보니 성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고 무리 없이 챙겨 온 여권과 예약 내역을 보여주며 입장할 수 있었다.


역시나 성은 거대했다. 거대한 건 둘째치고 그 안에 엄청난 정성이 들어가 있음에 놀라웠다. 세밀한 이슬람 건축양식과 공예를 보고 있으면 턱이 저절로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장대한 유산을 만들게 했을까, 과거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게 참 얄궂었다. 실상,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 누구도 제대로 이해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오후 4시가 되어가며 햇살이 길게 늘어졌다.

알함브라 궁전 자체는 6시까지만 운영했으므로 빠르게 둘러보고 내려와 간단히 커피 한 잔 마시고 궁전 반대편에 있는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 올랐다. 산 니콜라스라기보다는 사람 니콜라스 전망대로 불러야 할 만큼 사람이 많았다. 그라나다 도시가 전반적으로 사람이 많았는데, 이 정도면 그라나다 도시가 터져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전망대 위의 인구 밀도는 높았다. 이미 해는 지고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궁전의 오른편에는 달이 밝게 빛을 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전망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알함브라 궁전과 사진을 찍거나 알함브라 궁전을 사진 찍기 바빴다. 나도 그들 사이에 적당히 껴서 자리를 잡고 앉아 조용히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예전에 좋아했었던 노래들을 듣기 시작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마음속에 콕 박혔던 노래들만 눌러가면서 말이다.

궁전 뒷편으로 멀리 만년설이 보였다.

어린 시절에 듣던 노래를 들어가며 오랜 세월 늙어가고 있을 궁전을 바라보니 새삼 내가 이만큼 자랐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그렇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과연 서른을 넘겨 살 수 있을까? 그러던 것이 어느덧 이렇게 나이를 먹고 생전 와볼 거라고 생각도 못한 곳에 와서 달빛을 쬐고 있다. 사실 이런 날에는 내가 너무 기특하고 대견해서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러면 다들 꼴불견이라던데.


유난히 불안하고 또 불행한 시절들이었다. 하루에 불행 하나, 지나면 또 다른 불행 하나. 마치 산 넘어 산처럼 불행이 산재하던 나날들. 가난과 불행은 단짝처럼 손잡고 나를 괴롭혔다. 그러니 아직도 굳게 믿고 산다. 가난이 대문으로 찾아오면 사랑이 창문으로 도망간다는 말을. 그런 말을 좀처럼 허구가 아니다. 그때는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겠다고 온 힘을 내서 살아도 도대체가 살아낸다는 기분이 들지 않아 허무했다. 숨을 쉬는 순간마다가 괴로웠다.

멋진 궁전의 야경. 카메라에 다 담기지 못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고 돈을 벌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비교적 인생이 간단해졌다. 이미 검소했던 소비습관 덕에 돈을 남들보다 빠르게 모으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모인 내 재산은 내게 안정감을 줬다. 그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중심을 찾아 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중요한 건 균형이었으므로 적당히 벌고, 모으고, 또 쓰고. 삶에 불행 대신 행복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다져왔고, 이만큼 단단해졌다. 그게 대견해 미치겠는 걸 뭐 어떡해.


긴 세월 동안 누구도 해주지 않았지만 나 혼자서 스스로를 잘 어르고 달래 여기까지 왔다. 그랬기에 혼자 이역만리타국 땅에 와서도 안정감 있게 전망대 난간에 걸터앉아 있는 것이다. 그 오랜 시간 견디고 버티는 법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현재에 있다. 위험한 일인걸 알지만 오늘 밤에 조용히 내 스스로를 연민하기로 했다. 고생했다고, 정말 고생 많았다고. 나는 이 멋진 풍경을 볼 자격이 있다고. 저 멋진 성만큼이나 나도 이 세상에 단단하게 뿌리박았으니, 그건 성장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말하며. 더 좋은 날들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자고 말이다.

이런 일몰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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