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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san민산 Nov 29. 2022

굿바이 마이 빌런

조용한 해고_이제 나는 너를 잊겠어

지난여름 나는 1주일 모자란 일 년 만에 조용하지 않은 '조용한 해고'를 당했다. 마지막 회사로 이직하기 전, 그러니까 전전 회사에서는 근속 7년 차에 우레와 같은 '조용한 해고'를 경험했고 공황장애가 올 정도로 많이 아팠었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과 후에도 징조와 여진은 계속되었고 꼭 이 방법이어야 했나 하는 생각에 다다르면 머리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회피해야 할 책임이 얼마나 중대하길래 존중이 훼손될 만큼 그동안의 관계와 성과를 내팽개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임계치에 다다르면 그들이 원하는 사직서를 써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함께 파이팅하면서 성과를 만들어가던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도려지듯 너무 아팠다. 사람의 관계가 모두 다 투명할 필요는 없지만 휙휙 다른 색으로 바뀌는 것은 여전히 마주하기 어렵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깊은 우울로 나를 밀어 넣었다.  평생을 도전하고 부딪히고 이루어낸 나만의 커리어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다다르면 못 견디게 괴로웠다. 


오만가지 생각으로 나를 괴롭히는 전형적인 INFP 다웠다. 운동하자고 가볍게 일어설 힘도 없었고 무기력한 자기 연민에 시름이 깊어만 갔다. 


목표가 필요했다. 나를 움직일 수 있는 목표.

목표를 세우고 목표에 따라 스케줄을 만들면 나는 움직였다. 지난 30여 년 동안.


8월 15일부터 9월 26일까지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진행하는 ‘9월愛 동행’ 순례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 있는 순교성지 24곳을 순례하는 스케줄을 만들어서 안 그래도 생각으로 밥 먹고 살았던 나는 어두운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폭염경보가 내린 한여름에 서울 순례길을 걷기 시작했다. 


기도하고 순례하면서 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일어서고 싶었다. 그래서 순례길 닿는 곳마다 그곳의 사연은 나의 묵상이 되었고 헉헉 울면서 한걸음 한걸음을 기도처럼 꾹꾹 눌러 새겼다.


순례를 준비하면서 자료도 찾아보고 몰랐던 이야기들도 알게 되면서 이 여정을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기진맥진 늘어져있던 머릿속이 갑자기 전열을 갖추고 파바박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곳에 집중하는 이 에너지가 참으로 그리웠다.


'브런치! 브런치가 있었지!'


이미 수년 전부터 나는 브런치를 종종 찾아 읽던 은둔의 독자였다.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메일을 받은 것이 9월 27일이었으니까 작가로서는 한참 초보인 셈이다.

또 새로운 걸음을 내딛으며 서울 순례기는 첫 맏배를 봉헌하는 의미를 담아 나의 첫 브런치 북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는 곧 내가 겪은 직장, 사회 그리고 내가 만났던 직장 내 빌런들에 대해 글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현업에서 일해오고 살아낸 시간들은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격변의 시기였고 특히 여성 직장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놀랄 만큼 개선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지금 여성 근로자들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가 놀랄 만큼 좋다기보다 예전의 그것이 형편없이 열악했다는 의미에서.


1986년 전통문화 계간지 수습기자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0개의 회사를 다니며 일했던 다양한 업무, 다양한 조직, 업무 환경의 변화와 인프라의 격변, 성과와 회한들...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글이 한 줄도 써지지 않았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떠올리며 내 마음을 아직도 위로하는 중이었다. 여전히 가슴속은 그 못난 빌런들과 부글부글 싸우고 있었다.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까지 쏟아졌던 눈빛과 말의 폭력, 그 한가운데에서 나의 무너짐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안간힘으로 유지하던 평온의 밸런스. 그 긴장이 심해질수록 나의 신경 줄은 끊어질 듯 팽팽히 조여져 갔다. 그러니 문장이 만들어질 수 없지.


이제 그들과 작별을 고하려 한다. 

그들을 떠나보내야 비로소 그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업에서 정년퇴직하는 것이 나의 로망이었지만 뭐, 좀 이르면 어때.

죽을 것 같으면 다시 살아나고, 쓰러진 것 같으면 다시 일어서고 헤실헤실 웃으며 또 다른 길을 시작하던 나였으니 그런 근성이 다시 나를 이끌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이제 나는 너를 잊겠어.

굿바이 마이 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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