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아이유 - 밤편지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이, 사실 난 조금 싫었다. 내 행복을 온전히 빌어주는 그의 단호한 결정이, 사실 난 조금 무서웠다. 누군가의 행복을 온전히 빌어주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누군가의 불행을 빌어본 적은 있어도,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준 적이 있었나. 내가 이렇게 나쁜 사람이다.
그는 ‘다음에’, ‘나중에’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다음에 가자’, ‘나중에 하자’ 같은. 난 그 ‘다음’과 ‘나중’이 남기고 가는 모호함이 참 싫었다. 난 시작은 어려워했으나, 끝을 생각하는 건 아주 쉬운 사람이었다. 시작도 못 해보고 사라진 끝이 많았으니. 어쩌면 끝이 나에겐 더 익숙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내게 익숙한 끝을 생각하며 모든 관계에 최선을 다했다. 결국, 나의 노력은 이별을 비교적 담담히 준비하기 위한 과정인 셈이었다. 헤어지고 나면, 가장 후회가 되는 게 못 해준 것들이니까. 최대한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에 최선을 다했다. 내가 지금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는 현재에.
아마 이 지점에서 그와 충돌했던 것 같다. 난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그는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더 먼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이별에 먼저 슬퍼했으니까. 나는 그와 만나지 못하는 시간을 마주할 때마다 슬퍼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다음에 만나면 되지, 왜 속상해해~’하며 달래줬다. 난 그 말이 잔인하게만 들렸다.
‘난 민서가 혼자 보내는 시간도 행복하게 보냈으면 좋겠어.’
자신보다도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 그는 그걸 참 잘했다. 어떻게 저렇게 잘할 수가 있나. 싶으면서도 나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같이 더 있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던 순간이 나만큼 많았을까. 내가 속상해할 테니,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척. 내가 필요한 척을 했던 건 아닐까. 그런 못된 생각이 들었다. 만나지 못하는 시간도 행복하게 보내길 바라는 그 배려가 나한테는 그저 서운하게 느껴졌다. 내가 바빠서 만나지 못해도 그는 투정 한 번을 부리지 않았다. ‘알겠어! 다음에 만나자’라고 말했다. 아쉬워하지 않는 것 같아 그가 미웠다. 그가 나처럼 불행하길 바랐다.
나도 나를 도통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은 당연한 게 아니던가. 근데 난 왜 그가 나를 못 만나는 게 속상해서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가? 그럴 리가. 난 그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다. 근데, 그런데. 그의 행복을 온전히 빌어주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누구보다 성공하길 바라면서도, 나와의 시간을 더 많이 보내주길 바랐다. 나와의 시간이 더 먼저이길 바랐다. 그는 내게 그를 1순위로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게 1순위는 나 자신이어야 한다고.
내가 너무 못하는 걸까. 그가 너무 잘하는 걸까. 우리의 격차는 또 벌어지고야 말았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기에, 어떨 때는 너무 같은 사람이기에. 우리는 한 발짝 가까워졌다, 또다시 멀어지고 만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도 나를 사랑한다는 게 눈에 보이면 참 좋을 텐데. 눈에 안 보이니 알 수가 없다. 아니다. 어쩌면 그가 나를 더 사랑할 수도 있겠다. 모르겠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라니. 난 언제쯤 그의 행복을 온전히 내가 가진 마음을 다해 축하해 줄 만큼이나 사랑할 수 있을까.
나한테 그 일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고, 그가 담담하게 다음을 말할 때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 같지 않아 속상하다고 말했다. 솔직하게 털어냈다. 난 헤어지고 나서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는 천천히 내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말했다.
‘왜 민서는 벌써 끝을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그런 노력이라면 난 싫어. 난 민서랑 끝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
몇십 년 동안 고수해 온 나의 연애 가치관이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내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마치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른다며 전투 식량을 모아놓고 매 순간 벌벌 떠는 사람처럼. 미래를 걱정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언제 어떻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근데 미래를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일은 미련한 행동이었다.
끝을 생각하지 않은 고마운 그 사람 덕분에, 난 오늘도 내게 남겨져 있던 수많은 끝을 시작으로 바꿔본다. 끝보다 시작이 더 익숙한, 그런 사람이 되어보려고 한다. 가끔 찾아오는 불안에 비록 내 밤은 길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긴 밤을 빌려 몰래 빌어본다. 온 마음을 다해, 그가 행복하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