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권진아 - 진심이었던 사람만 바보가 돼
나는 팔베개해 주고, 그는 내 팔에 누워 폭 안긴다. 우린 대부분 연인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팔베개해 주는 걸 좋아하고, 그는 내 품에 안겨 있는 걸 좋아한다. 잠깐, 오해 마라. 절대로 내 키가 더 크거나, 내 덩치가 더 커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침대 밑으로 자기의 발이 빼꼼 나와도, 내 품을 포기하지 않고 안겨 있기를 참 좋아했다. 그러고는 사랑한다고 속삭인 뒤, 부끄럽다며 내 품으로 잽싸게 숨었다. 그런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난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우리는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그렇게 자주 누워있곤 했다. 저번에는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노래를 틀 차례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다음 생엔 너로 태어나 나를 사랑해야지’라는 제목의 플레이리스트.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곡이 흘러나왔다.
‘이 노래 진짜 좋아, 진짜 가사를 들어 봐야 돼. 진심이었던 사람만 바보가 돼’
‘진심이었던 사람만 바보가 된다고? 그럼 난 평생 민서의 바보 할래!’
뭐야, 네가 온달이냐. 하고 웃으면서 넘어갔는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자꾸 눈물이 나왔다. 나는 여태껏 바보가 되기 싫어 도망쳐 왔는데, 오히려 바보가 되고 싶다니까. 바보가 되고 싶을 만큼 왜 그렇게 나를 사랑하나 싶었다. 내가 뭐가 좋다고 나를 사랑하나. 나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나를. 왜 네가 자꾸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 주는지.
생각해 보면, 난 항상 사랑할 때마다 똑같았던 것 같다. 내 모든 걸 내어줄 정도로 최선을 다했고, 관심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질문했다. 이를테면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어릴 땐 어땠는지. 그리고, 나를 정말 사랑하는지. 그러다가 한 번은 내가 좋아했던 사람한테, 말이 너무 많아서 싫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그냥. ‘내가 말이 많구나. 줄여야 하나’라는 생각? 사랑에 빠진 내 모습이 영 별로인가. 아무래도 별로였나 보다. 나중에야 그 새끼가 양다리를 걸친 진짜 나쁜 새끼라는 걸 알았지만, 그런 나쁜 새끼가 한 말은 귀담아듣는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 말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힘들었다기보단 어려웠다. 어떻게 지워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숨겨보자.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에 빠진 내 모습이 별로인 것 같으니까, 열심히 사랑에 빠지지 않은 척. 모습을 숨겼다. 모습을 숨기다 보니, 마음도 자연스럽게 숨겨졌다. 숨겨지는 마음 탓에, 내 속도는 점점 느려져만 갔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줘도 좋겠다고 확신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서 대부분 확신하기도 전에 관계가 깨져버렸다. 연애할 때 내 모습이 어떤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반응들을 보아하니. 뭐,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으니까. 확신을 갖기 전까지 숨었다. 나는 숨는 게 쉬운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숨어있던 그 긴 시간을 처음으로 함께해 준 사람이었다.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천천히 할 수 있을 때 말해도 된다며 안아준 사람이었다. 왜 못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괜찮아, 기다릴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숨 막혔던 긴 침묵의 시간이 지났고, 마침내 나는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줬다. 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을 하면서도 그렇게 눈치를 봤다. 가끔 내가 말이 많았나 싶을 때는 확인차 물어봤다.
‘어. 지금 나 혹시 말이 너무 많았나…? 시끄러웠어…?’
‘아니? 인형 같아, 너무 귀여워. 나는 민서가 이렇게 이야기해 주는 게 좋은데?’
사실 그때는 그냥,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 다들 싫어했는데, 좋아할 리가 있나.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내가 말할 때마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자꾸 희망을 품었다. 내가 사랑하는 모습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랄까. 조금씩 그렇게 쌓여가고 있었는데, 바보가 되고 싶다는 말에. 품었던 희망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나도 진짜 사랑받을 수 있었구나. 그냥, 지금까지 나를 이만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못 만났을 뿐이구나. 하. 나 진짜 사랑받을 수 있었네. 나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네. 그런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 이런 게 정말 사랑을 받는다는 거구나. 바보가 되고 싶다던 바보에게 정말 고마웠다.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웠다. 바보가 되긴 뭘 바보가 된다는 건지. 이미 바보면서, 나는 바보 온달을 데리고 사는 평강 공주처럼. 그를 데리고 사는 평강 공주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을 보며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