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민석 Sep 14. 2023

올라! 아데우!

[스페인 여행] 바르셀로나의 슬픈 역사


 연착이었다. 


 게이트에서 비행기로 향하는 그 좁은 통로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 문이 열렸다. 내리쬐는 태양빛과 좁디좁은 통로를 가득 매운 승객들의 열기, 기약 없는 기다림은 모든 이를 지치게 만들었다. 이미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내 보조배터리는 국적 모를 외국인에게 빌려져 있었다. 아쉬운 듯 멋쩍게 웃는 그에게서 배터리를 돌려받고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리 오를리 공항을 출발하여 바르셀로나 엘 프라트 공항으로 향하는 여정. 1시간 4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타야 할 비행기는 악명 높은 부엘링(Vueling) 항공이었다. 이유 없는 뺑뺑이, 이유 없는 지연, 이유 없는 수화물 분실 등 여행자에게 극한 긴장감을 선사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방금 나 역시 알 수 없는 지연을 경험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은 짐을 집어삼키지는 않았다. 물론 티켓에 문제가 있었지만, 항공사 CS 부스에 찾아가 그제 보다 조금 늘은 영어로 해결을 해 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첫인상은 후덥지근한 열기와 습기를 머금은 공기였다. 런던과 파리에 비해 월등히 덥고 습했다. 그렇다. 이곳은 여름이었다.

 여름날의 바르셀로나의 거리는 무엇인가 달랐다. 우선 옷이 짧았다. 사람들은 과감한 노출로 더위를 즐겼다. 모두 짧은 원피스와 민소매 차림으로 밤을 즐기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사람들은 열대야를 피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 역시 타파스 한 입과 차가운 와인을 홀짝이며 더위를 피했다.




 바르셀로나, 당신에게 바르셀로나는 어떤 도시로 느껴지는가? 가우디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하몽과 츄로스, 스페인의 뜨거운 열기 등 다양한 대답이 나오겠지만, 그중에서도 제일은 축구다.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리그를 대표하는 축구단. 마라도나와 히바우드, 호나우두와 호나우지뉴, 사비 에르난데스, 수아레스, 이니에스타, 제라드 피케, 네이마르와 리오넬 메시까지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최상위권 선수들이 유니폼을 입었고, 매 경기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그들이 들어 올린 우승컵만 해도 수 없이 많다.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닌, 시민들과 조합원의 소유인 축구단. 바르셀로나 시민에게 그것은 클럽 그 이상(Més que un club)의 의미를 가진다. 가희 종교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위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경기는 무엇일까? 단언컨대 ‘엘 클라시코’다. 매년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이 경기는 마드리드를 홈으로 두고 있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홈으로 두는 ‘FC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말한다.


  전 세계의 팬들이 이 경기에 집중하고, 경기장은 늘 매진이 된다. 각 지역의 극장은 영화 대신 경기를 상영하고, 경기장에는 비장한 전운이 감싼다. 승리한 도시의 광장에서는 밤이 새도록 승리의 카니발이 울리며, 패배한 도시는 사라진 승점 이상의 우울감이 득실거린다.

 그깟 공놀이에 열광하는 이유는 오랜 시간 동안 엉킨 비우한 과거에서 기원한다. 단순히 서포터즈 사이의 도발이나 분쟁이나 경기의 해프닝으로 시작된 라이벌이 아니다. 이 두 도시 간의 감정의 골은 수십 세기 전부터 시작된 마드리드 일대의 카스티야 지방과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의 극심한 지역감정에서 출발한다.




 본래 카탈루냐 지역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가 있는 독립 영토였다. 8세기 초, 카스티야는 지방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레콩키스타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카탈루냐와 연합 왕국이었던 아라곤 왕국 역시 세력이 커졌고, 거대한 두 세력이 결혼을 통해 에스파냐 왕국이 성립되었다. 그 와중에도 카탈루냐는 독립적인 세력이었으나, 에스파냐 왕국의 정복을 이기지 못하고 편입되었다.

 이 시기부터 카탈루냐는 늘 독립을 꿈꾸며 살았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지역은 섬유 산업을 주축으로 한 공업이 발달했기에 부유한 지역이었다. 특히 바르셀로나는 중세 서지중해 무역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도시가 바르셀로나였고, 문화와 경제, 산업 모두 발달한 중심지였기에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자존심은 독립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실제로 반란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것이 1931년이었다. 당시 스페인은 왕정이 물러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신생 공화국이었다. 그렇기에 전국적인 혼란이 가득했다. 카탈루냐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탄압이었다. 그리고 1939년 스페인 군부와 공화국의 내전에서 승리한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항거한 카탈루냐 지역을 극단적인 탄압 정치를 시행했다. 실제로 스페인 내전 당시 바르셀로나에서는 대규모의 학살이 자행되었던 상흔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산 펠립 네리(Sant Felip Neri) 광장에 갔을 때, 나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도시를 밝혔던 해가 지고 어스름한 어둠만이 내려앉은 저녁, 작은 광장은 한 없이 평화로웠다. 오래된 성당과 작은 분수는 가로등을 빛을 품고 있었다. 수십 개의 탄흔이 박힌 성당의 벽은 가우디가 매일 기도했던 장소였고, 매일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다. 물소리가 지극히 평안한 광장의 삶을 지키는 듯했고, 작은 레스토랑에서 넘어오는 대화 소리는 그곳의 일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이 작은 광장에서 어린아이를 포함한 42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파시즘으로 무장한 프랑코의 군대는 마지막까지 공화국을 지지했던 바르셀로나 시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매일 하늘에서는 폭격이 쏟아졌고, 광장에서는 프랑코를 반대하는 인물들을 세워놓고 총을 쏘는 처형식이 일어났다. 

 이들은 마치 독일 나치 제국이 유대인들을 가려내듯 카탈루냐 사람들이 발음하기 힘든 단어들을 말하라고 소리친 뒤, 발음을 들으며 인종에 따라 처형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이 벌인 전쟁범죄는 글로 옮기는 것이 역할 정도로 끔찍했고, 강제 노동 수용소를 전국에 170여 곳을 운영하며 6만 5천여 명을 수용했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들 손에 죽은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우리는 선거 같은 위선적인 방법이 아닌, 총검과 피로써 쟁취해 냈다.’


 민족주의로 무장한 프랑코 정권은 파시즘이라는 미명 아래, 철저하게 카탈루냐를 배격했다. 그가 독재자로 지배한 38년 동안 국가 재정과 성장은 후퇴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피의 역사와는 별개로 카스티야와 카탈루냐의 갈등을 자신의 입지를 곤고히 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교활하게 사용한 탓에 참혹한 그의 집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민족주의를 단결하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역할로서 자신에게 끝까지 항거한 카탈루냐가 제격이었다. 따라서 프랑코는 카탈루냐 지역의 정치적 자치권을 박탈했다. 그리고 에스파냐국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또한 그들의 정체성을 박탈했다. 카탈루냐어와 카탈루냐기의 사용을 금지했다.


 이러한 탄압은 축구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코는 FC 바르셀로나의 정식 명칭을 카탈루냐어인 FC Barcelona(Futbol Club Barcelona)에서 스페인어인 CF Barcelona(Club de Futbol Barcelona)로 변경했다. 클럽 엠블럼의 카탈루냐기를 삭제하고 약어 역시 F.C.B. 에서 C.F.B로 바꾸었다. 이에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그들의 홈구장인 캄 노우 구장에서 이에 반대한다는 듯, 카탈루냐 기와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며 응원했다.


 프랑코 정권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사용했는데, 대내적으로는 국민들을 스포츠로 관심을 돌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단단하게 할 요량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정권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그는 레알 마드리드를 지원하면서 그 관심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런 역사 속에서 독재정권을 상징하는 레알 마드리드와 차별받는 이들을 상징하는 FC 바르셀로나의 경기는 총성 없는 전쟁과도 같았다. 


 레알 마드리드 팬의 입장에서는 바르셀로나에 편중된 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과 더불어 2등 시민 팀에게 진다는 것이 자존심이 구겨지는 일이었고, FC 바르셀로나 팬의 입장에서는 죽음과 차별 속에서 피어난 희망과도 같은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단순히 축구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카탈루냐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예전과 같은 적대감은 희석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팀 간의 대결은 아직까지 그들의 갈등을 상징하는 매개체처럼 여겨지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바르셀로나의 풍경은 따뜻했다.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 일광욕을 하는 이들과 신과 자연을 경외한 한 건축가의 소망과 작은 골방에서 세상을 관찰한 천재 미술가의 어린 시절의 기억, 신대륙을 찾아 떠난 여행가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금의환향한 기쁨, 피부를 스치는 도시의 산뜻한 바람과 기분 좋은 햇살이 녹아든 도시였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가족을 잃고, 차별받는 아픔이 존재한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자 노력하고, 독립을 꿈꾸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거리 곳곳에 걸려있는 카탈루냐 기를 보면서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듯싶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에 가면, 흔하게 알고 있는 ‘아디오스’ 대신 이렇게 안녕을 고하길 바란다. ‘또 만나’라는 뜻을 가진, ‘아데우’.

 부끄러운 얼굴로 이 단어를 말한다면 순간 멈칫하고, 기쁜 얼굴로 아데우를 말해주는 카탈루냐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레알(Reial) 광장과 아픈 역사가 스며들어있는 산 펠립 네리(Sant Felip Neri) 광장
낮의 에스파냐 광장의 전경과 밤의 몬주익 광장, 낮과 밤이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