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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민석 Sep 14. 2023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한 사람.

[스페인 여행] 안토니 가우디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물론 그 시작은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생산하고 수출하던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중세 무렵부터 유럽 서지중해의 무역의 중추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무역만 발달한 도시가 아니었다. 문화, 경제, 산업이 모두 발전한 모습을 가지면서 카탈루냐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카탈루냐 공국과 연합국이었던 아라곤 왕조의 확장세가 거대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라곤 왕국의 공주와 카탈로니아의 백작이 결혼을 했고, 그 후손이 아라곤 왕조 아래 두 왕국을 통치했다. 시간이 흘러 아라곤 왕조는 아라곤과 카탈루냐 지역을 넘어 발렌시아와 마르요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섬, 심지어 이탈리아 남부를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제국의 무역 중심 허브가 바르셀로나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르셀로나는 돈이 모이는 곳이었다. 부유한 상인들은 당시 유행하던 고딕 양식으로 자신들의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바르셀로나는 섬유 산업을 기반으로 성공적인 산업혁명을 이루어냈다.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는 처음 시도된 산업혁명이었다. 결국 바르셀로나의 경제적인 위세는 유럽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정도가 되었다. 그 의미는 바르셀로나가 돈이 모이는 도시임을 설명한다. 그리고 돈이 모이는 도시는 예술인들이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캔버스가 되었다. 그런 시대상에서 앞으로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릴 한 건축가가 등장한다.




 자존심 강한 한 건축가. 그에게는 늘 천재의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그는 바르셀로나 건축전문학교를 졸업한 건축사로서 다양한 곳에서 수주를 받아 건축을 하기 시작했고, 그의 이름이 세상 속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창의력은 비단 건물을 짓는 일로 한정되어있지 않았다. 가우디는 오브제에도 관심이 많았고, 1878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곤잘로 고메야의 장갑 진열대를 출품한다. 그리고 그는 인생이 바뀌는 귀인을 만나게 된다.


 구엘, 그는 사업가 집안의 후손으로서 백작 칭호를 수여받은 재력가였다. 당시의 재력가들은 단순히 돈이 많은 것 이상으로 문화, 예술에 조예가 깊어야 무시당하지 않았다. 그와 별개로 구엘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자신의 체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했다. 그러다 가우디의 가구를 만난 것이다. 구엘은 가우디의 천재성과 탁월한 능력에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자신의 장인이었던 로페즈를 찾아가 가우디를 소개해준다. 사위의 말에 장인은 이듬해 있을 왕의 방문으로 인해 대대적으로 수리해야 했던 별장 공사를 신인 건축사에게 맡긴다. 그것이 가우디와 구엘의 첫 만남이었던 작품, 구엘 별장(Finca Güell, 1883~1887)이다.


 이후 가우디는 구엘 가문의 전속 건축가가 된다. 구엘 백작은 가우디의 설계를 온전히 지지해 주었고, 무제한에 가까운 후원을 쏟았다. 가우디는 구엘과 함께 바르셀로나의 다양한 곳곳에 자신의 색이 담긴 건축물을 지어냈고, 이내 곧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잘 나가는 건축가가 되었다. 유명해진 가우디는 곳곳에서 다양한 수주를 받았다. 카사 밀라, 카사 바요트와 같은 고급 아파트와 구엘 궁전과 같은 저택을 만들기도 하고, 대규모의 도시 건축을 목표로 구엘 공원을 짓기도 했다.




 가우디가 천재라 일컬어지는 이유는 그가 보여준 양식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추구한 것은 ‘자연’이었다. 어린 시절 가우디는 몸이 좋지 않았다. 부모는 그를 학교 대신 여름 별장으로 보내 요양을 시켰다. 매일 산속에서 산책과 명상을 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가우디는 자연을 창조주의 작품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자연은 신앙의 무엇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건축학교에 입학해서도 자신의 철학을 담은 과제를 제출하고, 교수의 작품을 조목조목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이로 인해 교수들과 마찰이 있었다. 그로 인해 낙제를 받기도 하면서 가까스로 졸업을 했지만, 그에게 건축은 철학과 신앙의 표현이었기에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가우디는 거장의 작품 보다 작업실 앞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스승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철학과 신앙은 건축물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인간이 아닌, 자연과 공생하는 인간을 그려냈다. 직선이 아닌 곡선을 사용하고, 자연을 모방하며 건축물 안에서 살아가는 라이프 스타일을 마치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려놓았다. 당시 유행하던 ‘아르느보’ 양식을 건축에 대입한 천재적인 발상이 그에게 있었다. 물론 자연을 직설적으로 모방하는 수준이지만,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양식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가우디의 작품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바르셀로나의 방문한 첫 번째 이유는 그 공간을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굳이 돌아갔다. 사실 바르셀로나를 방문하지 않는다면 돈도 시간도 아낄 수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당을 눈에 담고 싶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숙소에서 나왔다. 아직 주무시고 계시는 홈리스의 매트리스를 살짝 피해 지하철을 타고, 가이드를 만나러 갔다. 다부진 근육질의 몸을 가진 가이드는 한 짐 가득 자료들을 짊어진 채로 고객들을 맞이했다. 나 역시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그가 건네주는 수신기를 받았다. 이어폰을 연결하고 그의 설명을 들으며 걷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귀를 통해 전달되었고, 정보들을 부지런히 편집하면서 뇌에 꽃아 넣기 시작했다.

 꽤 많은 양을 걷고 잠시 카페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능숙하게 주문을 받았다. 더운 날씨 탓인지 모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선택하였지만, 나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비록 츄로스는 커피에 비해 조금은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과 프랑스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맛과 여유를 느낀 듯했다. 가이드는 카페에서 가우디에 생애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 그의 전성기와 죽음까지 이야기했다. 그리고 곧 그의 걸작인 ‘사그리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향했다.


 성당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했다. 고딕 풍의 전통을 살렸지만, 아르누보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거대한 피사드는 웅장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관광객이 으레 그러하듯 사진을 찍고 바라보았다. 부분 부분은 ‘속죄의 성가정 성당’이란 이름에서 드러나듯 예수와 마리아, 요셉의 삶을 조명하고 있었다.


 성당 내부는 예약자에 한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기에 며칠 전 미리 예약을 해놓았다. 여유 있게 점심을 먹고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그 웅장함에 혼미해질 정도였다. 성당을 지지하는 기둥은 마치 인체의 뼈와 같았고, 스테인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과 어우러지는 순간 몽환적인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동이 트면 파랑과 연두, 초록이 어우러지고 서쪽으로 해가 지면서 점차 빨강, 주홍, 노랑의 빛이 스며든다. 탄생과 죽음을 해의 이동과 빛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내부를 방문한 시기는 일조량이 가장 많았던 오후였는데, 모든 창이 자신의 빛을 발하며 모든 색이 뒤섞여 내부를 밝히던 때였다. 


 누군가 유럽의 성당에 들어가면 그 위압감에 압도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한 순간이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빛을 뿜어내는 순간이었다. 색색의 빛이 인간을 향해 쏟아질 때, 하얀 기둥을 자신의 방법으로 물들일 때, 나는 한 없이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구역별로 다른 색의 빛이 반겼다. 단순한 구조일 뿐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강한 햇빛이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빛을 맞는 이에게는 세상의 탄생이 느껴지고, 예수의 죽음과 희생이 심장을 울리기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싶게도 만들었다. 가우디가 원했던 것이 그것이 아니었을까?



  

 혹자는 그를 자연을 모방한 수준의 건축이라고 평가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순수한 믿음을 기억한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자,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던 가우디는 하나님의 창조물을 온전하게 옮기는 작업으로 자신의 마음을 하늘에 전했다. 그의 건축물은 단순히 공간이나 건물을 넘어선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성당에 피어난 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관광객의 신분이면서도 그의 삶이 나의 곁에 다가온 것 같이 느껴졌다.


 그는 독실한 신자였다. 사람들은 가우디가 어딘가로 사라졌을 때에는 필시 수도원을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금식 기도를 수도 없이 진행한 전력이 있었다. 그런 그가 우연한 기회로 성당을 짓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설계를 맡게 된 것이었다. 그는 성당 건설의 총책임자가 되자, 집을 떠나 성당 지하의 작은 방에 거주하면서 설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성당 건설은 단순히 수주받은 작업이 아닌, 하나님께 얻은 은혜에 보답하고 카탈루냐 지방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길이었다.

 거대한 성당을 건축하면서도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존경을 놓지 않았다. 모든 첨탑과 장식은 자연에서 비롯된 모양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첨탑의 높이 역시 172.5m로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언덕에 비해 0.5m 낮게 설계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몬주익 언덕의 높이를 한낱 피조물인 자신이 넘길 수 없다는 겸손의 신앙을 보여주었다.


 창조주가 만들어낸 자연을 사랑한 한 피조물, 자신이 설계한 성당 지하에 누워있는 그는 그 완성을 볼 수 없었다. 1926년 6월 7일 거지꼴의 모습으로 길을 걷던 노인은 전차에 치여 사흘을 사경을 헤매다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사랑하는 창조주에게 기도를 드리러 떠난 길에서 가우디는 그렇게 죽었다. 전차기사는 그의 남루한 행색을 보고는 노숙자로 생각해 길가에 내버려 둔 채로 떠났다. 다른 이들이 정신을 잃은 그를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가려고 했으나, 세 번의 승차 거부가 있었다. 경찰의 인계로 겨우 택시에 탔지만, 두 번의 진료 거부로 빈민을 위해 설립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정신을 차린 그가 힘겹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고, 사고 소식을 들은 가우디의 주위 사람들은 더 크고 실력이 좋은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면서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으로 판단하는 이들에게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곳에서 죽는 것을 보여주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치료를 거부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바르셀로나의 관광을 책임지는 한 사람, 그의 삶은 때로는 대단했고, 때로는 초라했다.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괴팍한 천재 건축가, 자연을 사랑한 건축가, 초라한 죽음을 경험한 건축가 등 그를 수식하는 말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나는 그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신이 만든 모든 것을 담아내고자 했던 피조물.


 바르셀로나를 방문한다면, 가우디의 삶을 경험해 볼 것을 권한다. 그의 삶 속에서 신을 사랑한 인간의 온전하고 순수한 마음을 느끼길 간절히 바라본다.




까사 바트요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모든 곳이 묘하게 자연을 닮아있었다.
쏟아지는 빛은 경이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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