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배가 너무 아팠다. 부지런히 화장실을 들락거려 봐도 나아지지 않았다. 통증을 줄이려 배에 찜질을 하고 누웠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일어나니 점심시간. 아내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낫다고 하며 대신 가게로 출근을 했다. 아프기만 하다가 오전이 사라져 버렸다.
또 배탈이었다. 어젯밤 아내와 야식으로 먹었던 비빔면이 범인이었다. 아니다. 비빔면은 말없이 먹혔을 뿐이니 범인은 나였다. 저녁을 먹고 한 시간 넘게 운동을 하고 돌아왔다. 커피까지 마셨으면 잘 쉬다가 그만 공복으로 잠들었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TV 속 전문가들이 가짜 배고픔을 조심하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참 말을 안 듣는 나였다. 운동을 하면서 꿈꾸던 건강한 삶은 잊어버리고 뇌의 욕구를 채워버렸다. 불행하게도 얼마 전 사둔 비빔장이 눈에 들어왔고, 우리는 잽싸게 비빔면을 만들어 물만두와 함께 먹었다. 그런데 원래 비빔면 봉지에 들어있는 소스보다 비빔장 소스가 많이 매웠다. 당이 공급되자 뇌가 활성화되었다. 정신이 들며 슬슬 후회가 밀려왔다.
예전에는 둘 다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나는 모든 음식을 빨갛게 만들어 먹는 경상도 태생의 인간이었다. 너무 매워서 못 먹는 음식은 있을지언정 먹었다고 배가 아픈 매운맛은 없었다. 날 때부터 그렇게 먹으며 살았다. 학교 때문에 처음 상경하게 되었을 때 서울음식은 참 달달하고 순하다 하기도 했었다. 아내 역시 매운 음식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던 사람이었다. 배도 괜찮았다고 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매운 음식 잘 먹는 게 어디 자랑할 일이겠냐만은, 이제는 다 과거의 영광이다. 지금은 조금만 매운 음식을 먹어도 배탈이 난다. 닭발, 불닭은 당연하고 짬뽕이나 해물찜도 어렵다. 한국인의 영혼 김치를 만나도 맵기에 따라 포기를 각오해야 한다. 떡볶이가 먹고 싶으면 무조건 순한 맛이다. 매운맛 기준치를 조금만 넘어서면 바로 배가 아프다. 소위 말하는 '맵찔이'가 되었다.
예전에 매운 음식을 먹어도 건강했던 건 그저 몸이 젊었기 때문이다. 20대부터 한 방울씩 똑똑 떨어뜨린 물방울은 겨우 20년 만에 바위를 뚫어냈다. 나는 매운맛이라는 프로복서 앞에 헤드기어와 마우스피스도 없이 서 있는, 겁을 상실한 하찮은 일반인이었다. 스트레이트도 훅도 필요 없었다. 가볍게 톡톡 날리는 잽 몇 방에 나는 링 위에 쓰러졌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어젯밤 사건현장의 우리는 비빔면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는 흔하디 흔한 뉴스 속 범법자의 마음으로 매운 음식을 취했다. 먹으면 배탈이 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행동으로 옮겼고, 이에 미필적고의가 인정되어 몸의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 오후가 지났지만 아직도 배가 조금 아프다. 지난번 배탈이 났을 때 아내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제 매운 음식 먹지 말자. 안돼. 우린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