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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기에

한문은 왜 배워야 하는가?

by 민샤

회식 자리에서 닮고 싶은 선배 선생님과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선배 선생님이 저경력 시절, 사수 선생님이 알려주신 걸 지금까지도 실천하고 있는데, 교직 생활에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건 바로 퇴근 전 공람 문서와 문서등록대장 확인이었다. 매일 실천하지 못하지만,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선배 선생님의 업무 팁을 따라 한다. 그렇게 퇴근 전 확인한 공람 문서는 내 마음은 휘저었다. 그 후유증은 하루 이상 지속됐다.


공람된 문서의 제목은 ‘2022 개정 교육과정 선택교과 개설에 대한 학생, 학부모 의견 수렴 계획’. 호기심으로 클릭했다. 찬찬히 읽어보고 첨부파일을 열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어떤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운영하면 좋을지 교육 주체에게 설문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선택 군은 2가지로 한문/제2외국어, 진로/보건 중에서 투표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학생들의 높은 참여가 필요하므로 담임교사인 나는 학생들에게 링크를 전달하고 투표하라고 안내했다. 웃으며 얼른 투표하라고 했지만 내 마음은 석연치 않았다. 그날 나의 교과인 한문이 선택의 도마 위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물론 그전에도 선택의 고비를 한 번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교육과정이 개편되는 시기마다 견뎌야 하는 시련과도 같은 것이며, 그 시련을 견디지 못한 곳곳의 학교에서는 이미 한문이라는 과목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선택 교과란 그런 과목이다.


경기도한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문 교과는 대체로 학교당 한 명만 있기 때문에 내 교과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어렵고, 수업과 평가에 참고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다. 그래서 연구회에 참석해 교과 전문성을 증진하려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관리자부터 장학사, 수석 교사, 신규 교사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경력을 가진 한문 교사가 하나의 목적을 갖고 모인다. 모임 때마다 선배 한문 선생님들이 말씀하신다. 우리가 힘을 모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문 교과는 선택 교과이므로 개정되는 교육과정에서 소극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면 수업 시수가 줄어들어 순회를 나가거나 학교에서 교과가 폐지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런 위기감에 나도 더욱 적극적으로 외부 활동에 참석하려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내 교과는 내가 지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공람된 문서를 보자마자 투쟁적으로 교과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외치던 선배 선생님들은 본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배 한문 교사를 위해 말씀하셨던 거구나 하고 깨달음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나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한문 교과의 효용성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양질의 수업과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관리자들에게 한문 교과의 필요성을 피력하기 위한 수많은 도전과 시도를 해야 한다. 그렇게 불안전 지대로 내몰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발버둥 치는 수많은 한문 교사 중의 한 명으로서 어깨가 다소 무거워진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건 견딜 수 있지만, 더 이상 설 자리가 줄어든다는 현실은 견딜 재간이 없다.


우리말과 한자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자를 무조건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한자의 음을 듣고 한자의 뜻, 관련 어휘가 연상되는 게 핵심이다. 문해력이 중요하다면서 한자를 도외시하는 모순적인 사회 현상에서 한자를 외치고 싶다. “붕어빵에 정녕 팥 앙금을 뺄 건가요!” 물론 한자를 배운다고 해서 문해력이 무조건 상승한다고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한문 교육이 더욱 소홀해진다면 앞으로 문해력의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며, 한국어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이다.


강의 중 영어 단어의 어원을 설명하며 외우기 쉽게 설명하는 강사를 본 적 있다. ‘vid, vis’가 들어가면 보는 것과 관련이 있단다. video(비디오), vision(전망), visible(눈에 보이는), invisible(보이지 않는) 등. 처음 보는 영어 단어가 나와도 ‘vis’가 붙으면 ‘아, 보다와 연관되지 않을까?’라는 유추 과정과 문장의 맥락을 통해 단어의 의미를 추측한다.


이 과정은 우리말에서도 적용이 가능하다. ‘縮’의 뜻과 음은 줄어들다 (축)이다. 이 한자가 들어간 단어는 ‘축소, 축지, 위축’이 있다. ‘축소’란 줄여서 작아진다는 뜻이고, '축지'는 땅을 줄인다는 뜻이고, '위축'은 시들어 줄어든다는 뜻이다. 제시된 단어의 공통점을 추려보자면 '축'이라는 음이 주는 느낌은 뭔가가 줄어든다는 느낌이다. 줄어서 작아지면 축소라고 하고, 그 반대는 넓혀서 크게 한다는 확대라고 한다. 음, 이건 반의어 수업의 재료로 써야겠다. 결론적으로 영어 또한 어원을 가지고 배우는 세상에서 한국어의 한자를 외면하는 현실에 안타까울 뿐이다. 이 배움의 과정은 정녕 나만 즐겁고 유용한 것일까.


용비어천가 제2장의 한글 번역은(역주 용비어천가(한글번역문) 2015.3.5._박창희)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기에, 그 꽃이 아름답고 그 열매 성하도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기에, 흘러서 내가 되어 바다에 이르는도다.’이다. 한글의 뿌리에 해당하는 한자 교육이 자리를 튼튼하게 잡아야 올바른 언어생활이 정립된다. 한자라는 뿌리가 깊게 내려진다면 일상에서 펼쳐지는 대화 장면에서,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는 문학 작품에서, 자기 생각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창작 활동에서까지, 언어가 동원되는 그 어느 곳에든지 우리말이 찬란하게 꽃 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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