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이 쌓아 올린 자아가 무너지던 시간
아무것도 만들지 않던 날들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간이었다.
나는 명상을 했고,
책을 읽었고,
자연과 함께 머물며 사색했다.
사람들과의 접촉은 줄어들었고, 성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분명 나에게 필요했다. 그것은 나를 다시 숨 쉬게 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에는 늘 같은 질문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집요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는 나 자신을 내가 가장 먼저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커리어를 쌓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이를 키우고 있었고,
누군가는 뒤늦게 학위를 다시 시작하며
눈에 보이는 성취를 하나씩 더해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예전에 했던 일들은 이미 끝난 것 같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아직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때 잘 나가던 사람이 조용히 잊히는 느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기에 내가 가장 많이 착각했던 것은 ‘의미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다’는 믿음이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조금만 더 정리되면,
조금만 더 확신이 생기면
그때 비로소 다음 이야기가 시작될 거라 믿었다.
명상과 사색이 깊어질수록, 언젠가 큰 깨달음이 오면 그때 비로소 내 삶을 말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믿음은 나를 전진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가장 오래 멈춰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아무것도 만들지 않던 그 시간은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너무 많은 이름으로 살아왔던 나를 조용히 벗겨내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비키니 프로,
피트니스 모델,
트레이너 / 코치,
인플루언서 / 작가,
23만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
그 모든 이름이 어느 순간, 나를 더 이상 설명해주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모든 역할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나”로 하루를 살아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불안한 일인지,
그때의 나는 매일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시기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 기간이라기보다는
겹겹이 쌓아 올린 자아가 조용히 무너지고 있던 시간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더 얻기 전에,
더 되기 전에,
나는 먼저
내가 아닌 것들을 내려놓고 있었던 셈이다.
그 시간을 통과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예전의 기준으로 나를 증명하려 애썼을 것이다.
지금은 안다.
아무것도 만들지 않던 날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이 아니라
내 안에서 가장 많은 질문이
자라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 질문들은 바로 다음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럼, 이제 누구에게 말을 걸 것인가?”
“어떤 대화를 시작할 것인가?”
그 질문 앞에 서기 위해 나는 먼저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시간을 통과해야 했던 것이다.
이 글은, 대화를 시작하기 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GO ON — A Journey of Rising into Who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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