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질성과 마음거리
이번 글은 조금 가볍게 적어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내가 가르쳤던 Public speaking 수업에는 아시안 학생이 딱 한 명 있었다. 아무래도 비슷한 외모다 보니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나는 나름대로 동질감은 느끼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난 후 보니 이 친구도 비슷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나름대로 이 친구에게 애정을 가졌던 이유는 따로 있다.
A폭격기가 꿈이었던 나는 학생들에게 늘 나를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새로운 눈(?)이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채점을 하는 게 나이기 때문에 내 기준을 학생들의 과제에 맞게끔 피드백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점수를 올릴 수 있는 직접적인 기회임을 명확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된다면 내가 하루 전에라도 검토를 해줄 테니 피드백을 받고 싶다면 발표 3~4일 전, 늦어도 하루 전까지는 나에게 대본을 보내라고 조언했다.
학기 중 큰 발표만 다섯 개였던 이 수업에서 단 세 명의 학생만이 나에게 요구를 했는데, 맨 처음 첫 과제에서 이 학생이 나에게 이메일을 보냈었다. 어떤 마음에서 나에게 검토를 요구했는지 사실 나는 알 길이 없지만 정말 고맙기도 했고 또 기특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야 점수를 그냥 업그레이드해준다는데 왜 안 하지? 싶은 마음이지만,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굳이 데드라인이 있는데 먼저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친구에게는 약 세 번 정도의 피드백을 주었는데, 이를 반영하고 발전시키는 수준이 상상을 초월해서 피드백을 약 70%로 주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스크립트를 만들어와서 마스크 속에서 나는 입을 쩍 벌리고 감탄을 했었다.
* 이 역시 상당한 것으로 평균적으로 학생들에게 발표 전 스크립트를 받아 (이 역시 과제의 일환으로) 두 번의 피드백을 주었는데, 이 역시 1) 제출조차 하지 않는 친구들이 네다섯 명은 되었고, 2) 피드백을 반영하여 점수가 확 올라갈 정도로 반영하는 친구는 3명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훌륭한 태도에 감탄은 물론이고 같은 학생으로 부러움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하지 못할까? 싶은 마음에 반성도 상당히 많이 했다.
학기 초, 수업 시작한 지 채 2주가 되지 않았을 무렵, 수업이 끝난 후 이 학생이 나에게 다가왔다.
"너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곧잘 해?" (의역)라고 물어봤다.
이 질문은 내 영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쎄? 내가 영어 못하는 거 어차피 사람들이 다 아니까 그냥 뻔뻔하게 하는 것 같은데? 그건 왜 물어봐?"
"나 사실은 일본어를 배우고 싶은데 입 밖으로 꺼내기가 너무 어려워. 언어교환 어플도 사용해봤는데 차마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 그래서 외국어 배우는 방법을 좀 배우고 싶어."
"일단, 너 대단하다! 모국어에 영어에, 3개 국어를 하는 거잖아? 대단해!
두 번째로, 나도 사실 잘 못하긴 하지만 내가 조언해줄 수 있는 건 틀려도 괜찮다는 거야!
내가 말을 입 밖으로 못 냈을 땐 틀리는 게 무서워서였던 것 같은데 넌 어떠니?"
"맞아. 틀릴까 봐 말을 못 하겠어."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 내가 틀리게 영어 했을 때 너 내 말 알아들을 수 있니?"
학생은 싱긋 웃어 보인다.
"그렇지? 틀려도 어차피 말은 통해. 안 통했으면 상대방이 다시 물어볼 거고. 그건 네 몫이 아니야.
그리고 틀려야지 배울 수 있어! 처음부터 다 잘하면 공부를 왜 해? 뻔뻔하게 질러봐!
다 알아들으니까 괜찮아! 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해. 상대방(들)은 한국말을 못 하는데 나는 영어를 하는 거니까! 내가 못난 게 아니라고!"
조용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학생은, 진솔하고 때론 (자학개그로) 웃긴 스크립트로 우리 반 중심에 서는 학생이 되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연설문은 아니더라도 솔직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잡아내는 강점이 있는 친구였다.
학기가 후반에 들어서면서 "감사 연설"과제에 피드백을 해달라고 학생이 이메일을 보내왔고, 내용을 본 나는 걱정스러웠다. 자신이 일을 했을 때 관리자 역할을 했던 사람에게 감사하는 내용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과 모든 걸 해주었던 사람과 대조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면서, 무기력한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 대한 감사함, 박탈감 등이 나타나있었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내용 상 부족한 지점과 점수를 올리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보내준 후 바로 새로운 이메일을 적기 시작했다.
내가 쓸데없이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어서, 너의 스크립트를 보고 남일 같지 않아 쓰는 이메일이니 관련이 없다면 무시해도 좋아.
먼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린 사람들이 경험하는 당연한 부분일 거야.
나 역시도 내가 지금 뭘 하는 건가 싶을 때가 많아. 아마도 우리의 성격일 수도 있고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과정 중 일부분일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졸업을 하고 자리를 잡으면 다르게 느껴지겠지? (그땐 또 다른 불안을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내 생각엔 이럴 때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과 할 수 없는 부분을 구분지어서 생각해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감정적인 불안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일상적인 루틴과 행위들은 우리가 미래를 위해 직접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부분일 거야.
선생으로서 만난 너의 모습을 나의 입장에서 설명해 볼게. 너는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피드백을 요구한 학생이었어. 네가 어떤 결과를 만들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 남들 보다 더 노력을 해서 해냈고, 이건 너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줘.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면에서 노력을 기울이는 학생이야.
너는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한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이건 분명히 너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거야. 불안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은 걱정해도 소용이 없는 거니까 너는 막막하더라도, 선생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너는 지금 정말 잘하고 있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
---중략
(중략된 내용엔 혹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일 경우를 대비하여 학교 측에서 학생들과 상담할 때 추천해주는 resource들을 소개해주었다.) 간략한 (인사치레와 비슷한) 답장을 얼마 지나지 않아 받았지만, 여전히 나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이고 있었다.
이메일을 주고받은 후 처음으로 수업을 하는 날, 수업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는 엘리베이터에서 학생과 마주쳤다. 나가는 길에 가볍게 인사를 하던 중, 학생이 웃으며 이메일 정말 고마웠다고 먼저 말을 걸었다.
그리곤 나에게 말했다.
"미래가 너무 암담해."
"무슨 말이야?"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짧은 순간 생각을 해보니, 학생이 내게 이렇게 말을 한다는 건 조금 캐주얼하게 대화를 걸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인 것 같았다.
"그렇지. 나도 그래. 마음을 너무 급하게 먹은 건 아닐까? 너무 힘들면, 잠깐 쉬어가도 괜찮잖아! 한 학기나 1년 정도 조금 쉬면서 네가 진짜 뭘 하고 싶은지, 지금 하는 게 재미가 있는지 조금 멀리서 바라볼 기회를 만들어보는 건 어때?"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But I am Asian."
나도 모르게 빵 터져버렸다. 아마도 이 친구는 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대답을 할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내가 아시안이 아니었다면 이 뉘앙스에 크게 웃을 수 없었겠지. 웃으며 대답했다.
"Well, that makes sense.
(물론 곧이어 PC 한 대답을 이어나갔다. )
여기엔 여러 가지 맥락이 있다.
가장 먼저, 아시안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중 하나는 뭐든지 열심히 빠르게 해낸다는 것일 것이다. 특히나 미국 이주민 1세대 아시안의 경우, (자신의 자녀가 주류사회에 속할 수 있도록) 자녀들이 학업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면에서 뛰어날 수 있도록 노력 (혹은 압력)을 많이 가한다는 편견이 크다. 이 학생은 본인이 속한 인종에 관한 스테레오타입을 활용한 농담 + 미래에 대한 암담함 등을 섞어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진 것이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아닌 이상 인종과 관련한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농담을 던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인종에 대한 언급은 거의 금기시된다고 볼 수 있다. 이 학생의 경우, 선생 (혹은 청자)이 아시안이 아니었다면 이 농담에 대해 코멘트를 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 학생은 아시안에 대한 편견과는 별개로(?) 그 한마디 안에 녹아있던 자신의 어려움, 힘들었던 경험, 혹은 압박감 등을 농담처럼 표현했을 것이다. 아시안으로서 나는, 편견을 넘어서 어렴풋이나마 그 학생이 표현하는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남들에 뒤쳐져서는 안 된다는 압박을 느껴왔고, 특히나 해외에서 아시안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어떤 어려움을 갖는지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시안인 나이기에 편안하게 그 농담에 웃을 수 있었고, 그 웃음 안에 담겨있는 의미에 함께 마음 아파 할 수 있었다.
백인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부족하지만 선생역할을 하고 있던 나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와주고 내가 해주는 것을 몇 배로 발전시켰던 그 학생의 모습은 아직도 감동적이다.
학생에게 한 자 한 자 적어나갔던 이메일의 한 80프로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감정적인 사람임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도 있고, 특히나 공부에 있어선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일상이 공부를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에--aka 아무 재미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내가 공부분야에 대한 위로를 받고자 할 때, 나는 감정적인 공감보다도 근거를 토대로 한 분석을 통해 이야기해주는 것을 선호한다. 아마도 그런 나의 모습을 위로하기 위해서 학생의 모습을 하나씩 제시하며 나의 주장을 밝힌 게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난 저 학생이 털어놓았던 한마디 한마디가 아프게 와닿았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경험했던 그리고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들을 그 학생에게 투영시켰던 것은 아닐까? 동질성을 매개로 나의 어려움을 다루었던 걸까? 정답은 나도 모르겠지만, 단 한 명의 아시안 학생은 나에게 여러모로 감사함과 반성과 같은 여러 감정을 자극시켜준 좋은 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