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비가 내리면, 나는 내가 세상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_무라카미 하루키 (Haruki Murakami)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창문을 활짝 열어둔다. 꿉꿉하고 눅눅한 공기, 젖은 흙냄새, 차가운 빗소리가 밀려들어오는 그 순간이 이상하게 좋다. 나이가 마흔을 넘기고 나서야 이런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차 한 잔을 손에 들고, 그 비의 분위기 속에 가만히 몸을 담그는 일은 이제 내게 하나의 작은 의식처럼 자리 잡았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어릴 적엔 비가 오는 게 정말 싫었다.
초등학교 시절, 비가 오는 날이면 하교길이 더욱 길고 외로웠다. 다른 아이들 엄마들은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 나와 있었다. 나는 그런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부러운 눈으로 그 아이들을 바라보곤 했다. 나의 엄마, 아빠는 늘 바쁘셨다. 가게일에 치여 잠깐 짬을 내기도 힘들었기에,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나를 마중 나오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린 나는 그것이 너무 서운했고, 어쩌면 이해하면서도 마음 한켠 깊은 곳에서는 상처를 꾹꾹 눌러 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많은 비를 맞으며 우산도 없이 집으로 걸어가던 날들. 발은 질척거리고 옷은 흠뻑 젖어 무거웠다. 하지만 더 무거운 건 마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괜찮은 척, 이를 악물고 서 있던 그 작은 내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혹시라도 부모님을 더 힘들게 할까 봐, 집에 가서도 투정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조용히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다. 그게 당시의 '효도'라고 믿었다. 가난하고 바쁜 부모님에게 내가 부담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어린 나를 늘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비를 참 미워했다. 그건 단순한 날씨가 아니라, 외로움과 서러움, 말 못 할 감정을 끌어내는 신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감정이 조금씩 바뀌었다. 내가 부모가 되고, 나이가 들고, 삶의 무게를 이해하게 되면서 비에 대한 감정도 변했다. 어느 순간부터 비가 오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었고, 그리운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울다 웃기도 했다. 그렇게 나에게 비는 고통만이 아닌 치유의 이미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기다리게 될 때도 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곁에 두고 책을 읽거나, 오래된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천천히 가라앉히는 그런 여유를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비가 내리는 순간, 세상은 잠시 숨을 고르듯 조용해지고, 사람들의 걸음도 느려지며,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만 같다. 그런 분위기가 이제는 싫지 않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여전히 마음 한 켠에 조용히 남아 있지만,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자라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를 들으며 그 시절의 나를 살며시 다독여본다. 그리고 문득, 세상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나의 이런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도 조용한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