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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suh Choi Aug 03. 2017

연애세포를 깨우는 참 "예쁜" 뮤지컬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리뷰

<캐스팅>

키다리 아저씨/제르비스 팬들턴 역: 송원근

제루샤 에봇 역: 임혜영


학교 방학식을 하고 난 바로 다음 날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를 보러갔다. 작년부터 보고 싶었던 공연인데 표가 없어서 아쉽게 놓친 후에 브로드웨이 캐스트의 OST 앨범을 듣고 뮤지컬의 원작인 'Daddy Long Legs'를 읽으면서 재연을 기다려왔었다. 마침내 돌아온 재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 배우 중 하나인 임혜영 배우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예매를 했다.


한줄평을 쓰자면 이 뮤지컬은 무척 위로가 되는 공연이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드라마틱한 노래도 없고. 눈이 즐거운 볼거리도 없지만 따뜻하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2시간 가량의 러닝타임 내내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이 공연을 보기 전까지 나는 이 뮤지컬의 OST를 들으며 힘들 때 많이 위로를 받곤 했다. 특히 시험 전날 새벽에 책을 찢어버리고 싶을 때까지 책을 들여다볼 때, 어슴푸레 동이 트는 것을 바라볼 때, 시험 10분 전까지 아직 끝내지 못한 공부가 많이 남아있을 때 앨범 전체를 들으면서 공부하면 그 절망스러운 시간들도 결국에는 지나가더라. 이 공연을 보러갔을 때도 학기가 막 끝나고 이번 학기 동안 워낙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친 탓에 진지하게 내 삶에 대해 성찰하고 있던 차였다. 사실 뮤지컬이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절망적이고 힘들다고 생각했던 상황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힘은 준다. 이 공연을 보고 나니깐 설렘으로 가득찼던 초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요즘 계속 무기력했는데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창 밖을 보는데 하고 싶은 것들이 마구 떠오르면서 행복해졌다.


Musical 'Daddy Long Legs' 브로드웨이 공연 (출처: http://www.broadwayworld.com/)


본격적으로 작품에 대해 다뤄보자면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John Caird가 각본을 쓰고 Paul Gordon이 작사, 작곡한 공연으로 2007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초연을 했다. 그 후에 2012년에 웨스트엔드에서 초연을 하고 2015년에 오프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 여름에 초연을 하고 올해 2017년 공연은 재연이다.


이 뮤지컬은 2인극으로 2시간 동안 오직 제루샤와 제르비스 역의 두 배우만이 공연을 이끌어간다. '키다리 아저씨'의 특별한 점은 바로 "혼성" 2인극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남자 2인극은 '쓰릴미', '구텐버그', 라흐마니노프', '머더 포 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마이 버킷리스트', '돈 크라이 마미' 등 굉장히 많은 반면 혼성 2인극과 여자 2인극은 이상하게도 굉장히 드물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뮤지컬 관객의 대부분이 2,30대 여성이다보니 여성 관객이 좋아하는 남자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공연을 자주 올린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내가 '키다리 아저씨'를 보러갔을 때 전석 매진이었는데 1층의 남자 관객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저녁 8시 무렵 대학로에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이 무척 많은데 대부분 여자이고 남자 관객들은 여자친구와 함께 보러온 경우가 대다수였다.


조금 딴 길로 빠지자면,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관객층의 확대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한국의 뮤지컬 시장에서는 뮤지컬 한 작품이 나오는 과정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제작사가 적자니깐 배우들과 스텝들도 개런티를 제대로 못 받고 결국 적자를 매꾸기 위해 또 다른 작품을 올리는, 소위 말하는 '돌려막기'를 하다보니깐 공연이 엎어지기가 부지기수이다. 최근 뮤지컬 '햄릿'이 공연 시작 직전에 중단되었던 것이나 뮤지컬 '록키'가 개막 며칠 전에 취소되었던 것, 오래된 일이지만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의 공연이 공연 시작 몇 분 전에 취소되었던 일 등이 모두 '돌려막기'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어떻게 하면 모두가 윈윈할 수 있을까? 뮤지컬도 결국 '상업적인' 예술이기 때문에 돈을 버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관객점유율이 80%가 넘는 것은 힘든 일이고 손익분기점을 넘기도 굉장히 힘들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원인들을 짚어보자면 하나는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에는 라이선스 뮤지컬이 주를 이루는 만큼 라이선스 비용(저작권비)가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활발하게 창작뮤지컬을 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원인은 티켓이 너무 비싸서 사람들이 쉽게 보러 오지 않고 좌석이 잘 팔리지 않으면 초대권이나 할인 등으로 꾸역꾸역 매꾸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뮤지컬 티켓이 브로드웨이 시장이나 해외의 다른 뮤지컬 시장에 비해 특별히 비싼 편은 아니다. 하지만 브로드웨이와 우리나라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브로드웨이는 주관객층이 백인 중산층 중장년층으로 200달러에 육박하는 가장 비싼 티켓들이 쉽게 팔리는 반면(물론 브로드웨이는 그 좋은 좌석들을 당일 Lottery 등으로 학생들에게 30불 정도의 싼 가격에 팔기도 한다. 한 마디로 관객들의 경제적 수준에 맞게 다양한 가격으로 판매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주관객층이 2,30대 여성으로 현재의 티켓 가격도 무척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관객층을 넓혀서 더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오도록 하는 것이다. 제작사들이 이 글을 읽으면 '우리도 알지만 그게 쉽지 않다고!'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굉장히 이상적인 이야기이지만 점차 시장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문제들도 하나하나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시 작품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이 작품은 Jean Webster이 쓴 소설이 원작인 만큼 대부분의 대사를 소설에서 가지고 와서 기본적으로 대사나 가사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게다가 소설에 나오는 제루샤의 편지들을 대화체로 바꾸거나 각색한 것이 아니라 제루샤와 제르비스가 번갈아가며 자연스럽게 편지를 읽어나가는 형식이다. 원작이 편지체라서 이것을 어떻게 뮤지컬 대본으로 바꿀까 약간 걱정되었는데 훌륭한 무대화였다. 뮤지컬인 동시에 아주 멋진 낭독회 같은 느낌도 나서 색달랐다. 


키다리 아저씨에게 꽃을 받고 행복해하는 제루샤 (출처: http://blog.naver.com/jeremiah1017/221034654760)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사이다. 극중에서 제르비스는 제루샤의 편지만 읽고 이렇게 위트 있고 재미있는 편지를 쓰는 아이는 누구인지 궁금해하면서 점점 제루샤의 매력에 빠져든다. 이 대사가 단적으로 왜 제리비스가 제루샤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 납득이 되는 대사이다. 이러한 제루샤의 당당함과 섬세한 감정 표현들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18년 동안 고아원에서 한 방에 스무 명씩 살다가 이렇게 혼자 방을 쓰니깐 정말 평화로워요. 난생 처음 제루샤 에봇이라는 아이와 조용히 대화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제루샤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The Secret of Happiness'를 부르는 제루샤 역의 임혜영 배우(출처: 뉴스컬쳐)


https://www.youtube.com/watch?v=PGkWgIxFjX8


아저씨께,
크리스마스 이브 타워 꼭데기 제 방 안에 있어요.  회색빛 오후. 밖에는 접시만한 눈송이가 내리고 저는 최근에 만난, 아주 마음에 드는 소설책 한 권과 함께 창가에 앉아 있어요. 제인 에어. 이 책을 읽느라 어젯밤 절반은 꼬박 앉아 있었어요. 오늘 밤도 그럴거예요. 브론테 자매에게 매혹당했어요. 그들의 소설, 생애, 영혼.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어린 제인 에어가 자선학교에서 학대받는 장면에선 너무 화가 나서 밖에 나가서 한참을 걸어다녔어요. 존 그리어 고아원이 그랬다는 건 아니에요. 우린 음식, 옷은 충분했고 난로도 있었어요. 하지만 딱 한 가지 비슷한 건 매일매일이 너무나 단조로웠다는 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힘은 상상력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상상해볼 수 있잖아요? 그러면 친절해지고 이해심이 많아지고. 그런 건 어릴 때부터 개발해야 돼요. 그런데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의 상상력은 곧바로 짓밟혀요. 오로지 의무수행만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어요. 그런 끔찍한 단어를 아이들한테 가르치다니. 모든 행동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하는 거죠. 어두워졌어요. 눈을 반쯤 감고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보면 아저씨가 보이는 것 같아요.

                                                                                                           사랑을 보내며, 제루샤.

P.S. 사랑을 보내며라는 표현이 부적절한 표현이었나요? 어, 그렇다면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잖아요. 누군가를 사랑해야한다고요. 제가 아는 사람은 아저씨하고 리펫 원장님 뿐인데 원장님을 사랑할 순 없잖아요. 그러니깐 아저씨가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이 장면도 참 마음에 들었다.(위의 링크에서 임혜영 배우가 이 편지를 낭독하는 영상을 볼 수 있다.) 이해심이 많아지고 친절해질 수 있기 때문에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모든 행동은 의무가 아닌 사랑으로 해야한다고 말하는 제루샤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모든 행동을 사랑으로 해야한다는 말은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직 학생인 나조차도 해야만 해서 하는 행동들이 많은걸. 하지만 이런 이상적인 대사가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 같다. 캄캄한 극장 안에서는 잠시 현실을 잊고 밝은 세상에 빠져도 되지 않을까? 아, 그리고 뮤지컬을 볼 때 실제로 내 가방 안에는 제인 에어 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뭔가 제루샤와 내가 통하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제루샤 역의 임혜영 배우는 성악을 전공한데다가(전문 성악가들이 참여했던 뮤지컬 '팬텀'에서 무려 크리스틴으로 공연했던 배우다!) 주로 대극장 뮤지컬을 해서 그런지 성량이나 음색 면에서 무척 뛰어났다. 이 작품의 곡들이 음역대가 굉장히 넓고 고음이 주구장창 나오는 어려운 곡들인데 전혀 무리 없이 소화했다. 하지만 소극장이라서 그런지 대극장에 비해 음향이 짱짱한 편은 아니라서 소리가 약간 갇혀있는 느낌으로 들려서 아쉬웠다. 임혜영 배우는 거의 소극장 뮤지컬이 처음인데 두 명의 배우가 2시간의 공연을 이끌어나가야하는 작품을 능숙하게 잘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너무 사랑스럽기만 했다는 것이다. 원래 임혜영 배우의 음색 자체가 얇고 사랑스러운데 목소리톤을 평소보다 더 높여서 노래와 대사를 했다. 개인 차가 있겠지만 나는 조금 과하다고 느꼈다. 내가 생각하는 제루샤는 여성의 참정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던지 '이렇게 좋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여성과 여성을 태어나지 못한 남성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던지 후원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등 당당하고 독립적인 면모가 매력적인 캐릭터인데 그런 모습들이 덜 드러났던 것 같아 아쉬웠다. 송원근 배우는 '키다리 아저씨' 프레스콜 영상에서 보고 많이 기대를 했는데 연기와 노래가 기대를 넘어섰다. 대학로에서 주로 활동하는 배우들은 노래보다는 연기 쪽으로 더 특화된 배우들이 많은데 송원근 배우는 성량도 무척 크고 노래가 쭉쭉 뻗어나와서 좋았다. 가끔 던지는 애드립들도 유머러스했고 내가 상상했던 제르비스의 약간은 무뚝뚝하고, 서툴고, 로맨틱하고, 장난스러운 성격을 잘 연기했던 것 같다. 중간에 한 두 번 정도 대사를 씹는 실수가 있었지만 능숙하게 극을 잘 이어갔다. 앞으로도 송원근 배우가 나오는 작품은 송원근 배우 캐스팅으로 볼 것 같다! 나중에 퇴근길도 봤는데 무대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멋있었다.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의 음악들은 드라마에 강한 손드하임보다는 감미로운 와일드혼에 더 가깝다. 모든 곡들이 다 듣기 부드럽고 그 가사들은 음미할 수록 더욱 아름답고 깊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곡 없이 밝고 포근한 넘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의자에 기대서 미소를 머금고 볼 수 있는 공연이다. 무대는 대극장처럼 영화 같은 장면전환들은 없지만 아기자기하고 기발하다. 무대 앞쪽은 제루샤의 방 등 제루샤의 일상적인 공간들이라면 한 단 높은 무대 뒤쪽은 제르비스가 제루샤의 편지를 읽는 그의 사무실이다. 무대 곳곳에 놓여 있는 여러 개의 상자들은 책상이 되었다가 카페의 의자가 되었다가 서랍장이 되었다가 침대를 만들기도 한다. 사실 그다지 사실적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극에 필요한 모든 세트들을 몰입에 방해 없이 효과적으로 잘 만들어낸다. 이 공연은 하나하나 분석해보았을 때 크게 흠잡을 때 없는 '참 잘 만든 작품'이다.


소설 '키다리 아저씨'를 한 번쯤 읽어본 사람의 어릴 적 로망인 '키다리 아저씨'이다. 이 작품은 어릴 때 꿈꿨던 로맨스를 충족시켜준다고 할 수 있다. 공연을 보면 어린날의 그 마음이 떠오르면서 두근두근거리면서 제루샤와 함께 웃고 울며 극에 몰입하게 된다. 죽어가는 연애세포를 되살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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