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돌의 책 글 여행 Aug 27. 2022

행복의 문을 여는 사람들

'피그말리온 효과'를 경험해보셨나요?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들이 열린다. 대게 사람들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열린 문을 보지 못한다."
-헬렌 켈러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면 마치 내가 그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내가 태어난 곳도 드라마나 영화 속에 등장할 법한 시골 마을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고향을 물어보면 어릴 적 시골 풍경을 그려내기 위해 주소지를 얘기하곤 했다.

"저는 전남 함평군 OO면 OO리 OO 부락에서 태어났어요. 그 당시엔 부락(시골에 여러 집이 모여 이룬 마을)이라는 명칭을 썼어요. 버스를 타려면 한 시간 이상을 걸어 나가야 했죠."

"깡촌에서 올라와서 출세했네요."

듣는 이들은 이렇게 호응했다. 도시 생활에 적응하면서도 마음속에 시골 풍경을 안두 집살이 했다. 시골길수없이 걷고 또 다. 마을과 마을 사이 논과 밭이 펼쳐지 산자락이 마을을 감싸 안았다. 마을과 들판을 오가며  뛰노는 아이들 속에 단발머리의 여자아이가 함께 내달렸다.

'OO야 밥 먹어라.'

해 질 녘이면 마을 어딘가에서 무리 지어 놀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목청껏 소리 높여 이름 부르는 할머니, 엄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이제는 같은 이야기다. 중학교 입학하고 한 달 나는 서울로 전학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변화였다. 


낯선 환경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하며 향수병에 시달렸다. 시골 친구들이 몹시 그리웠다. 중학교 시절 내내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리움을 달랬다. 어느 날은 우체통에 편지가 10통 넘게 꽂혀 있는 날도 있었다. 내가 느끼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서울에 대한 친구들의 동경심맞물린 거였다. 그렇게 나는 쉽사리 도시 생활에 마음을 내어주지 못했다. 여전히 시골티를 벗지 못했고,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채로 여고에 입학했다. 그런데 같은 반이 되어 친해진 아이들이 유독 활달하고 자기표현이 분명했다. 그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스며들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 채로 사춘기에 접어들고 말았다. 일찌감치 공부에 손을 놓았고, 생각나는 대로 글을 끄적이며 마음을 달랬다.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
라는 말이 있다.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해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타인이 나를 존중하고 나에게 기대하면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이다.



대입 입시를 향해 달려가는 여고 시절 3년 내내, 나는 '공부'라는 '노'를  버린 채 표류하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반 친구가 "너, 나랑 같이 문예반 들어갈래?"라고 물었다. 둘이 이야기를 길게 나눈 기억도 없었지만, 이끌리듯 문예반에 들어갔다. 시화전이라는 행사에 참여하며 나름 형식을 갖춘 시를 썼다. 반 아이들이 더러 내가 쓴 시를 가져가 코팅해서 책받침으로 사용했다. 그럼에도 시간은 참 더디 갔다. 어떻게든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빼먹고 같이 어울리던 친구와 학교 밖으로 나가 곤 했다. 어느 날엔가, 야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책가방을 가지러 돌아오는데, 반 친구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붙들었다.

"야자 빼먹고 어디 갔다 왔어? 너, 문창과 간다며?"

"문창과가 뭐야?"

그 당시 모든 게 시큰둥하고 의욕이 없던 나는 무심하게 반문했다. 그리고 '문창과(문예창작과)'라는 전공이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공부가 뒷전이었던 만큼 어느 대학에합격하지 못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졸업 후 컴퓨터 학원에 다니며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로부터 뜬금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본인이 재학 중인 문창과에 인원을 두 배로 모집하니 지원해보라는 였다. 그 소식을 계기로 뒤늦게 준비해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돌아보면, 문예반으로 이끌어준 친구도, 문창과가 있다는 걸 알려준 친구도, 본인이 재학 중인 학교로 이끌어준 친구도 모두 지나가는 인연이었다. 내 안의 부대낌과 외로움에 집중하느라 관심을 보여주었던 친구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는 몰랐다. 

나에게 새로운 문이 열리고 있다는 걸.


위기와 기회는 쌍둥이임에 분명하다. 사람들 속에서 상처받고 치유하고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아왔다. 아픔을 주는 이도 치유하는 이도 사람들이었다. 내 안의 나와 소통하며 나를 알아가는 시간 속에 타인의 관심과 기대가 나를 자라게 하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느라 새로운 문을 보지 못할 뻔했다. 그럴 때마다 관심과 기대로 행복의 문을 열어준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녀들의 눈빛, 표정, 몸짓, 목소리가 여전히 나이를 잊은 채로 기억 속에서 파닥거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무엇으로부터 치유를 받고 있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