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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Jun 23. 2024

읽고 쓰는 도시여행자

"나는 도시여행자로 지하철 역사의 한 모퉁이를 걷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계단을 오르내리며 속엣말로 숫자를 세는 버릇이 생겼다. 그곳을 벗어나면 곧바로 잊어버리는 데도 숫자를 세면서 걸으면 지루함이 줄어들고 역동적으로 사는 기분마저 느낀다. 지하철 환승 구간이 길고 승차 시간이 촉박할 때는 걷는 속도가 빨라진다.


       그래, 이번엔 빨리 걷기다. 뇌가 명령한다. 속도감을 즐기며 리듬을 탄다. 나름의 운동 전략이다.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때도 가급적 오른쪽에 서 있지 않는다. 걷는 리듬이 깨지는 게 싫다. 속도가 붙은 몸의 에너지를 유지하고 싶다. 이렇게 긴 환승 구간을 두 번 정도 갈아타면 기본 5천 보 이상 걷는다.

 

       평소 숨쉬기 운동밖에 하지 않았던 내가 이런 습관을 갖게 된 지도 3년이 되어간다. 이전까지는 주로 자가용으로 서울 도심을 둘러싼 외곽순환도로를 달렸다. 대중교통 노선도와는 다른 길을 달리면서 차창 밖 풍경으로 사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였다. 운전석에 앉아 페달을 밟으며 세상 속으로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거대한 시공간 속에 혼자만의 길을 내는 듯했다. 창밖 풍경은 자꾸만 뒤로 밀려나며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 뱃살만 늘었다. 나잇살이 붙은 전형적인 마른 비만이었다. 운동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숨쉬기 운동밖에 하지 않았던 습관이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운전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으로 바뀌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었다. 지하철 노선마다 환승 구간이 있듯 내 삶 속에도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며칠 전에는 공항철도와 서해선으로 갈아타며 기분 좋은 긴장감과 활력을 느꼈다. 두 곳 모두 환승 구간이 긴 곳이다. 종종 다니던 구간이어서인지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환승 패턴이 몸에 익은 것이다. 익숙함에서 오는 걸음걸이가 경쾌하다. 무심히 지나치던 사람들의 표정도 읽힌다. 트렁크를 앞에 두고 앉아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들떠 보인다. 괜스레 내 마음도 술렁인다.

 

       나는 책을 꺼내 무릎 위에 펼쳐 놓았다. 책으로 시선을 떨구었지만, 확보된 시야에 여전히 맞은편에 앉은 앳된 여자의 트렁크 하단 바퀴가 보인다. 옆에 앉은 여자 승객은 부지런히 얼굴을 두드리며 화장하는 손놀림이 순간순간 스친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감의 초록색 정장을 입고 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드문 색상의 정장을 무난하게 소화했다. 책을 읽고 있지만 그들의 소리와 몸짓이 드문드문 잡힌다. 나는 시공간 속에 멈춰있고 그들만이 나를 에워싸고 움직이는 것 같다. 내 시간의 속도는 그들과 다르다는 착각마저 인다.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공존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머릿속으로 스며드는 책 속의 문장과 떠오르는 단상을 휴대전화 메모장에 기록한다.


미지의 세상에서는 계획한 대로 절대로 흘러가지 않는 여행의 속성을 잘 보여 준다. 여행은 자신이 가진 절대가치를 내려놓게 되는 여정이기도 하다. (...) 거짓말처럼 예전에 살던 도시와 익숙함을 다시 돌아보게 되고 전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여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은 그래서 자신의 원래 모습을 남처럼 타자화他者化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 임우진, 《보이지 않는 도시》, p.6-7



       내가 그들을 바라보듯, 그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비칠까. 플랫폼에 나를 떨궈놓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지하철 안 풍경이 기억에서 점차 흐려진다. 다시 걷는다. 읽고, 쓰고, 나는 도시여행자로 지하철 역사의 한 모퉁이를 걷는다. 조금 더 가깝거나 먼,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의 삶을 살아간다. 승용차에 앉아 바라보던 세상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들과 스치듯 지나가며 각자의 길을 걸어가지만, 그물망처럼 어느 공간에서는 엮였다가 해체되고, 반복하는 시간 속에 온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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