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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CO김 Feb 12. 2018

나도 빙하 위에 올라서다.

나는 참 사소한 기억력이 좋다. 누가 했던 동작 하나, 표정 하나를 기억하곤 한다. 대신 큰 기억을 잘 하지 못한다. 나와 같은 사람들은 본 적은 있다. 어릴 적 참으로 읽지 않던 책들 속에서 지구 반대편이 아르헨티나란 것을 알았다. 친구들과 철봉 밑에 앉아서 두꺼비집을 지으며 계속 파다 보면 아르헨티나란 곳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릴 적 아르헨티나는 하늘색의 국기 때문인지 축구 때문인지 그냥 멀고 먼 축구의 나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축구의 나라에 빙하가 있다는 것을 난 왜 알지 못했을까.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남미 여행을 시계방향으로 돈다. 페루부터 시작하여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순서. 간혹 반시계로 돌기도 하지만 나는 과감히 시계방향을 추천한다. 여행은 힘든 것부터 먼저 하고 집에 갈 때쯤 편해지는 게 원칙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페루의 고산과 볼리비아 사막의 흙먼지를 마시고 온터라 (그나마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이 있긴 하였다.) 꼬질꼬질함의 끝이었다. 그리고 한국사람에게 빙하투어를 예약하면서 김밥을 주문했는데 한번 맛을 본 적이 있어 나는 훨씬 더 간절하였다.(처음 갔었을 때 한 번에 김밥 6줄을 먹었다.)


아침부터 가방 깊숙이 넣어두었던 발열내의와 두꺼운 양말을 꺼내 들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이고 빙하 위라 바람이 생각보다 차다. 이날을 위해 편하고 따뜻한 기능성 옷들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선글라스와 선크림은 필수다. 처음 갔었을 때 눈이 부셔서 눈이 아플 지경이었고 사막에서 하나도 타지 않았던 얼굴이 새까맣게 타버렸었다.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그 위에 선글라스와 넥워머로 얼굴을 감싸고 출발했다. 호텔로 픽업 나온 버스에는 감사하게도 김밥이 따끈따끈하게 준비가 되어있었고 나는 참지 못하고 꼬다리를 하나 물었다.


모레노 빙하로 알려진 이곳은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전초기지인 엘 칼라파테에서 한 시간가량을 가다 보면 호수 위로 빙하가 보이고 그제서야 빙하에 왔다는 것을 실감한다. 배를 타며 가는 중간중간 떨어져 나온 빙하들은 먼저 우리를 반겨준다. 배를 타고 가는 와중에도 빙하는 쉼 없이 밀려와 끝부분들이 떨어지면 천둥소리를 낸다. 그 소리와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할쯔음 배가 멈추고 하선을 했다. 가이드는 두 명, 영어와 스페인어로 나뉜다.

가방을 보관하는 곳까지 있어서 더 편하게 여행할 수 있다. 가면서 가이드는 역사에 대해 설명하지만 다들 가이드 뒤로 펼쳐진 빙하 때문에 귀담아듣지 못한다. 듣지 않는 게 아니라 듣지 못한다. 아이젠을 신고 이제 빙하로 올라선다.

멀리서 보면 얼음덩이 같고 가까이 서보면 눈 언덕 같지만 실제로 올라서니 정말 딱딱한 얼음이었다. 손으로 벽면을 긁어도 긁혀 나오지 않을 정도의. 모레노 빙하에 갈 때는 꼭 빈 물통을 하나 들고 가야 한다. 빙하 곳곳에 세차게 흐르는 물줄기에 병을 넣고 물을 먹어보면 다른 물은 절대 못 먹는다. 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물'이라고 생각한다. 음식이라고 하기엔 그럴 수도 있지만 모든 물에는 맛이 존재한다. 내가 좋아하는 '물의 식당'은 바로 사찰이다. 사찰에서 먹는 물들은 각기 '내가 가장 맛집입니다'를 뽐내는 듯하다. 하지만 이 곳 모레노 식당에서 파는 물에 비하면 런던 수돗물에 비 할 정도다.

(내가 뽑은 물이 맛있는 곳 순위 1. 모레노 빙하 2. 스위스 라우트부루넨 3. 경주 불국사)

사실 이 물은 바로 먹으면 가장 맛있지만 가방 속에서 시원하게 놔둔 뒤 김밥과 함께 먹기 위함이다.


빙하는 몇천 년, 몇만 년의 세월을 겪어 인간이 표현할 수 없는 색을 내고 있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보이는 파란색은 옆에 계신 형님의 말로 '뽕따'색을 내고 있었다. 무슨 색인지 고민하던 찰나 어릴 적 꼬다리를 사투하던 그 '뽕따' 덕에 한 번에 정리될 수 있었다. 아름다운 '뽕따'와 닮은 빙하의 속.


오르락내리락 40분여 남짓을 하다 보면 저 멀리 테이블 하나가 보인다. 내가 가장 기대했던 순간이다. 빙하를 깨서 온 더 락으로 먹는 위스키 타임. 가파른 빙하를 오르락내리락하다 만난 위스키는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설레는 순간이었다. 티비속에서만 보던 모습. 처음에 왔었을 때 연거푸 네 잔을 먹었다. 스페인어를 잘 할 줄 모르지만 영어만큼이나 스페인어는 자신 있었다. '밤 영어' , '서바이벌잉글리쉬' 에 자신 있었고 '밤 스페인어' 까지는 터특했던지라 '우노 마스(하나 더)'를 외쳤다. 내려갈 때까진 괜찮았지만 다시 선착장까지 배를 타고 가는 동안 기절했었던 터라 우노 마스를 한 번만 더 외쳤다. 

아껴먹다 보니 빙하가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이 아름다운 잔을 들고 있으니 내 손안에 빙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어오는 찬바람을 속에서는 뜨끈뜨끈하게 데워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잔일까. '그만 드세요'라고 말하는 주위 사람들 뒤로 나는 열심히 열심히 합리화를 했다.


나도 빙하에 올라섰다. 

어릴 적 손톱 밑에 새까맣게 변할 때까지 땅을 파면서 만나고 싶어 했던 그 아르헨티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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