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존재이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면 어쩌면 우리에게는 너무나 피하고 싶은 단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인데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거나 새로운 모임을 갈 때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내가 한 번도 겪어보지 않는 것이고 내가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릴까, 나는 그곳에서 어덯게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걱정말이다. 죽음이라는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던 없는 사람이던 죽음이라는 단어는 전혀 가벼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라는 생각을 말이다. 나는 가끔 죽음이 두렵다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간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하게 될 것이고 내가 죽음을 맞이할 때 만약에 내 영혼이 내세나 천국으로 가지 못하고 갑자기 소멸하면 어떻하냐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진격의 거인처럼 무겁고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그 죽음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스러운 죽음을 카프카라는 작가는 구원으로 보았다. 참 신기한 사람이다.
누구나 한 번 쯤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한 외판원이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벌레가 되어 버렸다. 그 외판원의 이름은 그레고르로 그가 벌어온 돈으로 그의 부모님을 부양하고 그녀의 동생의 꿈을 이루어 주려고 하는 평범한 남자이다. 그런데 그가 바퀴벌레 비슷한 벌레가 되어버렸다. 카프카는 그레고르가 왜 벌레가 되어 버렸는지에 대한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어 버리자 회사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가족들도 그가 무슨 일이 있는가 그의 방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모두가 그가 벌레가 된 것을 보고 놀란다. 아마도 그가 벌레가 된 모습을 보고 놀랄 정도면 벌레의 크기가 컸을 것이라고 짐작이 가능하다. 여하튼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자신이 일을 계속 해야한다고 미친 사람처럼 말을 중얼거린다.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고, 자신의 동생의 꿈을 위해서 자신은 일을 해야한다고 계속 중얼 거린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우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맛있는 음식 사진이나 잘 보정된 사진을 올리면서 사람들의 호응과 공감을 받기를 원한다. 어린 학생들은 학교에서 시험 성적을 잘 받으려고 하는데 부모님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정말 좋아서 하기도 하지만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열심히 산다. 이처럼 그레고르가 광기를 보이며 벌레가 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일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벌레가 되어 가면서 그는 그의 벌레 라이프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한다. 가족들에게 배척을 당하면서도 그는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느낌을 받게 된다. 그는 처음으로 비록 몸은 벌레가 되었지만 자신의 몸에 대해서 촉감으로 느끼며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레고르가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은 일종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가? 현대 사회 속에서 아니, 그냥 확 좁혀서 한국 사회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 볼 시간을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내면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경쟁을 시작한다. 요즘 아이들을 기점으로 생각하면 아이들은 유치원에 가기 전까지 영어 학습지나 영어 교육을 받으며 유치원에서도 계속 교육을 받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고등학교 과정까지 선행학습을 하느라 친구들과 놀기 보다는 학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선행 학습을 하고 특수 목적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 공부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잠을 세시간에서 네시간 정도 자면서 수능시험을 준비한다. 대학에 들아가서도 경쟁은 계속 된다. 취업을 하기 위해서 학점을 잘 따야하고 공모전에 나가야 하고 토익 점수를 내야한다. 취직이 되어도 언제나 야근을 해야하고 저녁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늙어간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없어 보인다. 벌레가 되버리기 전 그레고르처럼 우리는 우리 내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계속 달리기만을 한다.
벌레가 되어 버린 그레고르는 집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지만 그는 집의 문제거리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기 위해 일을 찾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그를 점점 혐오하기에 이른다. 벌레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레고르의 일러스트를 찾아보면 사람의 얼굴에 바퀴벌레의 몸을 가지고 있다. 벌레라는 것은 이 소설에서 쓸 모 없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런데 벌레의 쓸모 없음은 사회적 맥락으로 살펴 보아야 한다. 지금의 자본주의 시대에서 쓸모 없는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돈을 벌지 못하는 존재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고 나서 그는 가장의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경제적인 이익을 가정에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런데 앞에서 내가 사회적 맥락에서 쓸모가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가 아닌 사회에서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쓸 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시대는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효율적이지 못하면 비효율적이라고 명명하며 비효율적인 것은 모든 것이 치료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카프카가 벌레가 되는 이 형태는 그가 자본주의 시대에서 쓸모없는 행위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의 삶을 참고하자면 그의 존재를 존재답게 만드는 글쓰기를 하는 것이 바로 벌레가 되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에 경제적인 이익을 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을 먹고 책을 출간하지 않는 이상 카프카의 글쓰기는 자본주의 시대에서 벌레가 되는 것 그 자체였다. 그레고르의 가족들의 눈으로 돈을 못 벌고 썩은 음식만 먹는 그레고르는 쓰레기 그 자체였다.
카프카의 일생을 바라보면 그는 아버지라는 세상 속에 갇혀 살았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그를 억압했고 그는 아버지에게 저항했지만 매번 패배했다. 그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일종의 일시적인 구원이었다. 글쓰기가 구원이 된다는 것이 정말 재밌는 발상인데 나는 이것을 조금은 느낀다. 나도 마음이 착잡하고 뭐할 때 글을 써내려간다. 글을 쓴다는 것은 몰입하는 매개로 글을 쓰다보면 어느 순간 나는 글에 빠져있고 그동안 세상과 나는 단절이 되어 버린다. 그동안의 압박이나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같은 것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일종에 일시적인 구원이었다. 왜냐하면 글쓰기를 마치는 순간 그의 앞에는 다시 세상이 버티고 있었고 아버지라는 세상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과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자 그레고르의 아버지는 벌레에게 사과 조각을 던지고 그 사과 조각은 그레고르의 등에 꽂힌다. 그러면서 그레고르는 죽음의 문턱으로 다가가며 죽어 버린다. 카프카의 삶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에게 저항하지만 언제나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고 그는 다시 저항을 하지만 저항을 하다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변신>의 그레고르는 인간이 벌레가 되어 가지만 인간과 벌레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다. 그와 달리 짧은 단편인 <학술원에의 보고>에서는 원숭이가 인간이 되려하지만 그는 인간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닌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즉, 카프카의 일생은 자신의 구원과 억압적인 현실 속에 글을 쓰면서 그 중간에 놓여 있는 존재였다.
그는 소설 속에서 아버지의 사과 조각을 맞아 죽었다. 즉, 그는 세상에 굴복했다. 그러나 그런 굴복이 변화되어 그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카프카는 죽음이야말로 자신의 구원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를 압박하는 사회와 투쟁했지만 언제나 포기하고 도망을 쳤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방법은 죽음 밖에 없었다. 그가 죽음으로써 그는 세상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워졌고 더이상 그를 압박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이것을 보고 카프카는 죽음으로 신의 경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는 아담의 원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원죄를 씻기 위해서는 인간을 제물로 드려야 했다. 그러나 제물이라는 것은 순결하여야만 하지만 모든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타락한 존재였다. 즉, 그 누구도 제물이 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을 가진 예수만이 더렵혀지지 않은 인간며 신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세상과 죄에 굴복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이 세상의 원죄를 모두 씼어 내고 그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게 된다. 아마 카프카는 그레고르의 죽음처럼 자신은 비록 죽지만 그 죽음 속에서 자신은 구원을 받고 자신의 실존은 계속 이어질 것을 생각했던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불길하지만 죽음만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없다.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인조인간이나 뱀파이어 혹은 슈퍼맨 같이 영원불멸의 존재가 된 사람들의 고민을 보면 참 재밌다. 그들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일종의 저주로 보았는데 내가 지금부터 수명이 무한이 되어 산다고 하면 나는 살려는 의지를 잃어 버릴 것이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살려고 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매우 모순된 이야기 같지만 죽음이라는 친구는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게 만드는 좋은 친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