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시스템에 따라 살다보면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망각한다.
'제발 좀 절 놓아주세요. 더 큰일이 나기 전에 그 거짓된 꿈을 태워 없엘 수 없나요? 아침에 나갈께요. 아버지를 침대로 모셔다 드리세요.'
오늘도 내 친구는 야근을 한다. 이제 내 나이의 친구들은 하나 둘 취업을 해서 점점 아저씨가 되어간다. 하지만 많은 친구들이 기업에 들어가서 괴로워 한다. 한 친구는 자신의 부서 사람들이 너무 나이가 많고 상사의 재미없는 개그를 받아야 한다고 힘들어 한다. 또 한 친구는 토요일이나 일요일까지 회사로 가서 자신이 못한 일을 해결한다.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은 오늘도 취업 포털을 바라보면서 자기소개서를 쓴다. 자기소개서를 100개 가까이 쓰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 때 한국에서는 취업을 해도 문제고 취업을 안 해도 문제인 것 같다. 한국에서 인간의 일생은 단지 일을 하기 위한 존재로 키워지는 것 같다.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 것도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취업의 기회를 얻는 것이며, 대학에 가서도 학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 모두가 목숨을 건다. 그런데 한국에서 재미있는 점은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한 아이는 자신의 꿈이 사라지고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한 것마져 망각해버린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목적의식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회적 시스템이 인간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서 밀러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통해서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을 이미 미국 사회 속에서 예견했던 것 같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윌리는 평범한 세일즈맨이었다. 그는 나이가 든 세일즈맨이고 두 아이를 둔 아버지이다. 윌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과거를 왜곡한다. 자신을 잘 나가던 세일즈맨이었고 지금은 단지 늙은 것 뿐이고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이런 아서 밀러의 극에서 윌리는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눈여겨 볼 점은 그동안의 고대 그리스 시대의 비극과는 다른 현대극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스 극에서는 고귀한 귀족 신분의 사람이 무너져 가는 극을 그렸다면 아서 밀러의 극은 미국의 평범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아서 밀러가 평범한 윌리를 주인공으로 잡은 것은 이것이 매우 확장적으로 적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윌리의 모습은 강건너 미국인의 모습이 아니라 누구나 윌리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윌리가 자신의 과거를 왜곡하면서 살아갈까? 이것은 마치 기성세대가 말하는 "우리 때는 말이야~"와 비슷하게 자신의 삶을 영웅처럼 표현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나는 가끔 기성세대가 왜 과거에 집착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에 자신이 사는 현실이 행복하다면 과거를 포장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현실이 행복하지가 않을까?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이렇게 노력해서 달려온 길의 끝에 이런 의문이 들어서일 것이다. "왜 나는 여기에 서있을까?" 일 것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시스템에 꼭 따라가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시스템을 따라간다. 그러나 그 시스템의 끝에는 평생 저녁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나의 가족과 행복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윌리는 사회 속에서 평범한 사람이지만 가정에서는 가정을 억압하는 폭군으로 돌변한다. 윌리의 아내는 순종적이며 첫째 아들 비프는 돈도 못 벌고, 결혼도 안하는 백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둘째 아들 해피는 여자들과 성에 빠져서 자신의 삶을 탕진하고 있다. 윌리는 첫째 아들 비프에 대해서 아주 큰 기대를 두었는데 이것은 아마 자신의 자신이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는 컴플렉스 때문에 자신의 꿈을 아들에게 투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비프는 그의 삶의 의지를 잃어 버렸다. 그 이유는 보스턴에서 아버지 윌리가 바람을 피는 것을 어린 비프가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상처 때문에 비프는 살아가야할 의지를 점점 잃고 있다. 윌리의 집은 일그러진 집이다. 비프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할정도로 이 집은 무너져 내려간다. 왜 윌리가 비프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추측을 해보자면 가장이라는 존재는 어떻게든 욕을 먹을 수 없는 구조가 이 사회이다. 한국의 케이스를 보자면 한국의 가장들은 말이 없고 독단적인 면을 많이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젊은 시절과 가정에 투자해야할 모든 시간을 회사에 투자했다. 회사를 위해 살았고 회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한국 사회 속에서 회사라는 개념은 다른 나라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의 기업들은 개발 시대를 통해서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한국식 자본주의는 두 가지 문화를 가지는데 첫번째는 유교주의이며 두번째는 군대문화이다. 나는 여기서 유교주의를 변형된 유교주의를 통해서 윗사람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는 문화가 정착했다. 어떤 생각을 하던 윗사람의 의견이 맞고 윗사람의 노예처럼 굴어야 한다. 여기에 군대문화가 합쳐져서 계급문화와 회사 속에서 개인은 일종의 톱니바퀴가 되고 개인의 정체성 보다는 '우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 복종을 하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개발주의 시대에는 이런 한국식 자본주의와 함께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의식에 따라서 많은 직장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갈 곳 바로 가정은 그들의 자리가 사라지고 그들은 꼰대가 되었다.
윌리는 더이상 자신의 아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죽음을 선택한다. 차사고를 내서 자신이 죽고 그 보험금으로 비프가 살아가길 원한 것이다. 극의 결말은 너무나 슬프다. 윌리는 꿈을 가지고 가정을 위해서 돈을 벌어왔다. 그러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살로 자신의 생애를 마감했다. 윌리가 이런 극단적인 결말을 맞이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자신을 누군지 모른다는 것은 일종에 삶의 목표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우리는 모든 삶을 시스템을 따라서 간다. 그 시스템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우리는 보상을 받을 것이며 아름다운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시스템은 우리를 망각의 세상으로 인도할 뿐이다. 이것은 비단 윌리의 이야기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윌리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일에 빠져서 일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일이라는 것은 일단의 우리의 삶의 수단일 뿐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한 마디로 하기에는 너무 어렵지만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그것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이유는 우리가 행복하고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한 일종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행복을 누리기에 일이 너무나 많다. 나중에 아이를 낳고 가정이 생기게 되면 우리는 취업난 속에서 아이들의 꿈을 어깨에 이고 가면서 살아간다. 회사들은 그 꿈을 인질 삼아서 사람들에게 일을 시킨다. 밤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면서 나에 대한 고민도 없이 모두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망각한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힘든 일일 것으로 생각이 되어진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계속 일을 하는 것은 일종의 삽질이다. 알베르트 카뮈는 시프스 신화를 들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시지프스는 신에게 죄를 지어서 돌을 산 위로 끌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이 벌의 괴로움은 육체적인 피로가 아니다. 그가 돌을 산 위로 끌어 올리는데 그 돌은 저 아래로 떨어진다. 시지프스는 영원히 그 돌을 다시 산 위로 올리며 그 벌을 영원히 이어진다. 시지프스의 비극은 돌을 들어 올릴 때가 아니다. 시지프스가 돌을 밀려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데서부터 시작이 된다. 땅 아래로 내려가면서 '나는 왜 돌을 영원히 올려야 할까'라는 생각부터가 그의 비극의 시작이다. 그렇다. 사람은 몸이 힘들면 아무 잡념도 들지가 않지만 몸이 잠시 쉬게 되고 그 사이에 자신의 모습을 바라 볼 때 괴로움에 휩쌓이게 된다. 그때 카뮈는 시지프스가 그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단 한가지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나의 의지로 이 돌을 밀고 내가 이 벌을 받겠다는 인간의 의지'라고 말을 한다. 즉, 자신의 과오에 대해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것이다. 시지프스가 이런 초인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홀로 돌을 올리려고 내려가는 그 시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 바라보고 자신의 의지를 생각해낸 것이다. 아서 밀러의 극 또한 이 비극은 사회의 제도로 부터 나온 비극이다. 즉, 기존의 극들과 달리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제도이기도 하다. 즉, 사회의 비극을 만드는 제도를 바꾸는 그 시작점은 바로 내 자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일 것이다. 그 속에서 삶의 목표를 찾게 된다면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표가 있다면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생의 의지로 인해 모든 것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