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인정하고 너를 인정하고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사랑을 하는 행위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한다. 특히나 남녀간의 사랑은 자신이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단점을 보게 도와준다. 사랑하는 연인이 생긴다는 것은 나의 마음에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마음에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매우 성가신 일일 수도 있었다. 누구를 만나고 사랑한다는 것은... 왜냐하면 그동안에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환경과 전혀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차지해 오기 때문이다. 연인이 생기게 되면 나는 개인적으로 자주 싸우고 싸움을 말로 이해하고 서로 봉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인 간에 갈등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싸우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이 서로 차이점이 많이 생기고 그 차이점으로 인해 서로가 오해가 생긴다. 그러나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 차이점을 조율해가며 서로 손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것은 복잡하다. 다양한 종류의 사랑도 있지만 솔직히 사랑에 대해서 이 한 페이지에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리하여도 이 글들을 읽어보면서 비록 우리가 사랑의 한 단면만을 볼테지만 그 단면을 보는 것 자체가 나는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20대 초반에 피츠 제럴드가 쓴 <위대한 개츠비>에 푹 빠져 살았다. 왜냐하면 개츠비 같은 사랑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뉴욕에서 최고의 부자다. 그는 주말마다 뉴욕의 많은 사람들을 초대한다. 손님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개츠비가 누군지는 몰라도 그의 파티에 간다. 상식적으로 개츠비는 끝없이 모르는 사람들을 초대할까? 모든 파티에는 목적이 있는 바이다. 그러나 개츠비가 쾌락적인 파티를 여는지를 모른다. 나중에 소설을 읽다보면 알게 되지만 개츠비의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은 개츠비의 진정한 손님이 아니다. 개츠비의 파티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한 파티이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연인이자 지금은 톰 뷰케넌의 아내가 된 데이지가 오길 기도하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데이지가 오면 그 파티는 완성이 된다. 나는 아마도 이런 개츠비에 매혹이 되었던 것 같다. 자신의 모든 것을 줄 기세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개츠비의 모습은 너무나 로멘틱하다. 그런데 여기서 데이지라는 여자는 재미있는 여자다. 과거 데이지는 순수한 여성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데이지의 모습은 속세에 물들고 오히려 요염하고 남자를 유혹하고 종국에는 남자를 파괴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혹, 사람들이 왜 개츠비가 이런 여자에게 사랑에 빠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냐는 반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남자로 이런 여성들을 보았을 때, 내가 이 여자를 따라가면 파괴가 될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 매혹을 거부하기란 쉽지가 않다. 어떻게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파괴라는 그 매력의 향기가 남자를 끌어당긴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가 보고 있던 데이지의 모습은 과거의 순수했던 데이지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이 제 자리에 가져다 놓을 것이라며 데이지의 사랑이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을 믿는다. 지금의 데이지의 모습은 순수함과 악녀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는 여자다. 그러나 개츠비는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가 어떻더라도 사랑하리라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 속에서 개츠비의 사랑은 개츠비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개츠비는 모든 것을 희생했고 죄를 저지른 데이지를 감싸주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에게는 독이 되어 톰 뷰케넌의 계략에 의해서 개츠비는 죽임을 당한다. 개츠비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왜냐하면 개츠비는 데이지를 끌어 오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속였다. 자신의 신분도 숨겼고 그 많은 돈도 불법적으로 번 것이다. 그가 자신을 속인 것은 데이지가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사랑하지 않을까하는 걱정 때문이라고 추측을 해본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사랑이라는 것은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것이다. 존재와 존재가 만난다는 것은 각각이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는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츠비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데이지 또한 이미 뉴욕의 가식의 세계 속에서 사랑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즉, 소설은 이미 비극적인 결말로 나아갈 것을 암시했던 것 같다. 사랑을 할 때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마음이 있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자신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위대한 개츠비>에서 그래도 피츠 제럴드가 왜 위대하다를 붙였을까를 한 번 고민해봤다. 조금 엄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개츠비가 위대한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기 자신이 거짓이 되더라도 한 여자에 대한 순수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칭해졌다고 생각한다.
셍 택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도 사랑이 나온다. 솔직히 어린왕자를 사랑이야기 하나로 풀어낸다는 것이 웃기긴 하지만 이번에는 어린왕자와 꽃의 사랑에 초점을 맞춰 생각을 해보겠다. 어린왕자에는 많은 주제들이 들어 있다. 그 중에서 관계에 대한 부분이 제일 많이 부각이 되어 있는데 <어린왕자>가 동화로 써져 있어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표현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어린왕자>는 재밌는 부분이 많이 있다. 어린왕자가 사는 별에 씨앗이 흘러 들어와 장미꽃이 나타난다. 여기서 장미는 내숭쟁이인데 헛기침을 하면서 여자의 자존심을 보여준다. 어린 왕자에게 계속 요구를 하면서 바람을 막아 달라고 하고, 야수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한다. 장미는 어린왕자에게 계속 요구를 하다가 왕자는 갑자기 빡치 쳐서 집을 나가버리는 것이 여행의 시작이 된다. 왕자는 자신은 아낌없이 장미의 요구를 들어주지만 장미는 개속 툴툴댄다. 그러자 눈이 돌아간 왕자는 장미와 머리 끄덩이를 붙잡고 싸우다가 행성을 나가는데 나는 이 장면이 참 재밌었다. 장미는 겉으로 허세를 부리지만 외로움도 많이 타고 순수하고 마음이 여린 여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왕자는 이런 장미의 겉에 말은 알아 들어도 속 내용은 알아듣지 못했다. 왕자는 타인을 사랑해준다는 것이 타인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받아주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도 연애를 하다보면 많은 남자들이 범하는 잘못이 여자들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다. 가끔 여자들은 학교나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서 툴툴 거린다. 그렇게 되면 남자의 경우 그것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여자의 욕을 먹는다. 그리고 남자들은 왜 그런지를 모르고 여자들은 이해 못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여자들은 공감을 원한 것이지 해법을 원한 것이 아니다. 어린 왕자가 행한 행동은 이런 연장선인 것 같다.
그리하여 집을 나간 왕자는 여행을 하다가 장미의 정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수많은 장미들을 보며 놀란다. 자신의 장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들판에서 사막 여우를 만나서 '관계와 길들이기'에 대해서 배움을 받는다. 여우의 가르침은 관계에서 특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첫번째는 상대를 신뢰하라! 두번째는 천천히 다가오라!는 것이다. 즉, 한 사람과의 관계가 맺어지려면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기본이 되고 그 관계가 오래도록 천천히 형성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관계를 맺게 되면 상대방은 의미부여를 받게 된다. 이런 의미부여는 매우 중요하다. 여우의 가르침을 받고 장미의 정원으로 돌아온 왕자는 괜히 장미들에게 짜증을 부린다. 장미들에게 너희는 나와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내 행성에 있는 장미는 서로 시간을 보내고 신뢰를 했었다. 그러니까 너희는 나에게 의마가 없고 내 행성에 있는 장미만이 존재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이 이런 형태로 가야한다고 믿어야 한다. 나와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은 둘만이 공유하는 비밀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산책을 즐기며, 같이 놀이 공원도 가고, 같이 술도 먹기도 하면서 그것은 추억이 된다. 그 비밀스러운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 상대방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다. 상대방을 존재론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렵게 말할 것 없이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을 공유하면서 '사랑'이라는 책을 같이 써내려가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먼저 자신을 인정하고 타인의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다. <어린 왕자>는 그것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솔직히, 기독교 신자분들이 아닌 분들이 있다면 기분이 나빠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성경 이야기를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전도하려고 쓴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한 종류를 보여주기 위해서 쓴 것이다. 그러니 그 점은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 13:31-38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지막으로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궁극의 사랑인 것이다. 위의 본문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최후의 만찬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일종의 고별 설교인데 예수의 생애 목표는 바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광을 받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가끔 크리스천 연예인들이 자신이 상을 타면 이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말한 말한 영광과는 차이가 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사회에서 거대한 성공을 하면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영광의 길을 간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었다. 아담의 원죄를 위해 인류를 위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 바로 영광의 길이었다. 예수님 또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걸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종했다. 예수님은 이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그것은 바로 새계명을 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동참하고 싶다면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평범하고 누구에게도 자랑못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다. 예수가 그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제자들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신다.
그러자 욱하는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별 설교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 보고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자신도 따라가서 죽겠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베드로라는 인물은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돌려서 말한 것이다. 베드로야 나는 죽으러 가지만 너는 살아라... 내가 너 때문에 죽으러 가는데 너는 너의 목숨을 아끼고 살아야 한다. 때가 되면 내가 너를 부를테니... 너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너는 알아야 한다. 신이 자신의 아들을 포기할 정도로 인간을 사랑했다는 것을 너는 알아라 그러니 너는 하나님과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뭐... 나도 일요일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설교를 많이 듣지만 솔직히 행동으로 옮기가 쉽지가 않다. 나의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까지 사랑하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정말로 행동에 옮긴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이 사랑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에게 열광을 한다. 나는 생각한다. 사랑의 마지막 단계는 정말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아직도 사랑이 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나 깨달은 것은 사랑이란 굉장히 어렵지만 이 세상 속에서 제일 가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