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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Sep 20. 2016

5. 진실과 거짓 : <인간실격>과 <이방인>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자신의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더 잘 살아가기 위해, 거짓은 진실의 그림자.'


위의 말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드라마로 만든 '신참자'에 나온 대사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 거짓말을 하고 살고 있다. 남자들의 경우 여자친구가 머리를 하고 왔는데 정말로 그 머리가 최악이다. 그런데 거기서 '너 머리 진짜 구려'라고 하면 남자는 그 하루는 힘들어 지고 일주일 동안 힘들어 질 수 있다. 이럴 때 남자는 살아남기 위해서 '어 정말로 이뻐'라는 이야기를 해야한다. 사실 앞의 이야기는 장난삼아 이야기한 것이고 우리는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사회에서 일을 한다면 말이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진실된 나로 살아가지 못하고 거짓의 가면을 쓰는 이유는 아주 자명하다. 모든 것을 진실되게 말할 경우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회적인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회사에 들어가서 회사원들이 제일 힘들어 하는 것은 바로 회식 자리이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들은 재미 없는 이야기를 하고 매일 똑같은 에피소드를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해서 들려준다. 상사 밑에 있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재미가 없더라도 재밌다고 웃어야 한다. 만약에 재미없다고 한다면 상사에게 찍히거나 승진이 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이익은 곧바로 우리의 생존의 문제로 이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진실함과 거짓의 가면에 대해서 고민한 작가들이 있었다. 한 명은 다자이 오사무이고 다른 한 명은 알베르트 카뮈이다. 이들이 창조한 오바 요조와 뫼르소는 양극단을 달리는 인물들이다. 한 명은 세상이 싫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의 가면을 쓰고 한 명은 공감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솔직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정말 골 때린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거짓으로 살아왔다. 오바 요조


오바 요조는 일본의 근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인간 실격>을 읽다보면 현실에서 소설로 들어갈 때 매우 기분이 좋지 않은 주인공을 마주하게 된다. 오바 요조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찰자는 오바 요조의 세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첫번째 사진을 보고 웃고 있는 원숭이 같은 아이, 두번째로 거짓 웃음을 짓는 이상한 미남 마지막 사진으로 머리에 흰 머리가 있지만 도저히 특징이 없는 남자라고 평을 하는데 책을 읽다보면 그로테스크하다. 오바 요조는 소설 속에서 매우 이성적인 인물로 나온다. 그는 사람에 대한 공포를 가진 인물이지만 사회라는 괴물에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해 거짓된 가면을 쓴다. 그는 기이한 행동을 하며 바보같은 장난을 일삼으며 철저히 가면을 써나간다. 책을 읽다보면 이 주인공의 어린시절이 정말 암울한데 그는 정치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러나 여성적인 요조 앞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신을 억압하고 밀어 붙이는 존재이다. 어린 시절에 요조는 책을 선물로 받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요조에게 호랑이 가면을 사준다. 그 호랑이 가면은 일종의 아버지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가부장적인 사회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요조는 아버지의 집에 있는 하녀들에게 성적으로 몹쓸 짓을 당하는데 그것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인간을 불신하거나 혹은 기독교적 박애주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가 믿지 못했던 것은 사회이며 그 사회는 인간들을 거짓의 가면을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불신의 사회를 만드는 사회가 요조는 싫었던 것이다. 요조의 눈에 그 사회는 아버지의 세계였으며, 가부장적인 세계이며, 개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였다. 


요조는 어린시절을 그렇게 보내다가 운명의 친구를 만나게 된다. 타케이치라는 친구였는데 그는 유일하게 요조의 거짓을 바라보는 친구였다. 그는 요조를 진실로 대하는 친구였고 요조가 그린 도께비 그림을 그리고 감탄한다. 요조의 도께비 그림은 요조의 분신이다. 언제나 웃고 있지만 그 안에는 어둠에서 호흡하는 도께비의 모습이 바로 요조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타케이치는 요조에게 화가가 될 것을 이야기해준다.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요조를 이해해주고 요조의 잠재성을 바라봐 주는 친구는 이 친구가 유일하다. 그리하여 요조는 아버지께 자신은 화가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지만 당연히 거절당한다. 아버지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 되라고 하고 요조는 그 말에 순종하고 동경으로 상경을 한다. 그곳에서 요조는 호리아키라는 얼간이를 만나고 호리아키로부터 술과 여자와 약을 배우게 된다. 요조는 이 시점부터 아버지의 세계에 저항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여자들을 이용해서이다. 오바 요조는 창녀와 잠자리를 가지며 창녀로부터 모성애와 동질성을 느낀다. 그리하다 카페에서 쓰네코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는데 다방에서 술을 따라주는 여성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오바 요조는 쓰네코를 바라보면서 창녀들과 다른 점을 본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마음 속에 어둠과 고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잠자리를 가지고 자살을 하자고 마음을 먹는다. 둘이 자살을 하지만 쓰네코는 죽고 요조는 살아 남는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요조는 아마도 평생에 쓰네코를 죽였고 자신을 살아남았다는데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이후 그는 거의 아버지에게 의절을 당한다. 그는 아버지의 세계에 죽음으로 도전했지만 실패로 끝난 것이다. 그 이후 편집국에서 일하는 여자와 동거를 하다가 그녀의 딸이 '진짜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이야기를 듣고 또 뛰쳐 나가고 술집 마담과 동거를 하다가 술집 앞에 있는 담뱃가게 아가씨를 만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 여인의 이름은 요시코였는데 요조가 그동안 여자들과 또 달랐다. 요시코는 처녀였고 처녀성을 간직하고 순수한 존재였다. 요조는 그녀의 순수함에 끌려 그녀와 결혼을 한다. 아마, 그의 삶에서 진실되게 대할 수 있는 여자였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호리아키와 요조는 술을 진탕마시는데 요조의 아내는 아래서 콩을 찌고 있었다. 호리아키는 화장실로 가려는데 최악의 장면을 본다. 그것은 어떤 남자가 요시코를 강간하는 장면이었다. 그것을 보고 호리아키는 윗층으로 올라가서 요조를 부른다. 강간범은 도망가고 호리아키는 복잡한 일에 엮이기 싫어서 도망간다. 요조는 자신의 부인에게 아무 것도 못하고 자포자기해 버린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에 대해 분노를 하는데 그녀의 부인은 사람을 신뢰했을 뿐인데 일면식이 있던 남자가 그 신뢰를 부수고 자신의 아내를 강간했다는 것에 인생을 포기한다. 그는 모르핀을 맞으면서 인간실격자가 되고 나중에는 정신병원에 갇힌다. 3개월 후 그의 형이 와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고향으로 와서 요양을 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요조는 20대지만 흰 머리가 생기면서 40대처럼 늙어 버리고 나중에는 간병원한테 강간을 당한다. 그러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암울하다. 이 소설은 진실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가면을 쓰다가 완전히 인간 실격자가 되어버린 요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요조라는 인물은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성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된 삶을 살아간다. 그는 여성의 세계에 동경을 가지고 여성의 세계는 공감을 하고 사랑이 있는 그 세상 속에 살아가고 싶지만 요조는 태어나서부터 남성적 인간의 삶을 살아갔다. 그것은 바로 요조가 아버지의 세계, 술수를 쓰는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처럼 자신도 거짓된 가면을 쓰면서 사람들을 속였기 때문이다. 그의 파멸은 아버지의 세계와 여자의 세계 사이에서 한 곳으로 가지 못하는 그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준다.



나의 무관심이 바로 저항이다. 뫼르소


프랑스에는 요조랑 완전히 다른 뫼르소라는 인물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그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간단히 생각하면 매우 극단적인 알파고 같은 사람이다. 그의 삶에는 거짓이 없다. 그가 공감을 할 수 있다 없다의 차이를 보면 번역으로 찾기는 어렵다.  'Aujourd’hui, maman est morte' 는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라는 프랑스어인데 카뮈의 <이방인>의 이 첫 문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여하튼 maman이라는 단어는 우리식으로 하면 '엄마'라는 단어이다. 즉, 언어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필요가 없을 것 같고, maman이라는 단어에는 애정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maman은 상대방과 나 사이의 가까운 유대감을 보여주는 뉘양스의 언어이다. 즉, 뫼르소는 공감 못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단지 너무나 솔직한 남자라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다음날 자신의 여자친구와 해변에 가서 수영을 즐긴다. 솔직히 우리의 눈으로 보면 뭐 이런 미친놈이 다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뫼르소는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 눈치도 보지 않는다. 뫼로스과 바라보는 세상은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전통, 혈연, 종교와 같은 것에 억매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가족 중에 누군가가 돌아가시게 된다면 그 사람을 추모한다고 밝은 색 옷을 입지도 않고 고인의 명복을 기린다. 뫼르소처럼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행위는 사회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이다. 그것은 고인을 모욕하는 행위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뫼르소는 이런 사회적인 규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 사회제도가 자신을 가두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뫼르소의 솔직함은 나중에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뫼르소는 니스의 해변에서 아랍인과 시비가 붙는데 그를 쏘아 버린다. 그런데 그가 왜 아랍인을 총으로 쏘았는지에 대해서 뚜렸한 동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뫼르소는 태양이 강렬하다는 것만을 외친다. 태양이라는 것은 <이방인>을 읽을 때마다 계속 나온다. 태양이라는 것은 달과 대비되는 존재이다. 태양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폴론에 대응된다. 아폴론은 규칙과 틀과 이성을 상징하는 신이다. 즉, 태양이라는 존재는 뫼르소에게 있어서 사회의 압박이다. 뫼르소는 혈연이나 종교나 기존의 전통을 신경쓰지 않고 살지만 사회는 그에게 이런 모든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우리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있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는 수능 공부를 꼭 해야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취업을 위한 준비를 해야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회의 압박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 보다는 '너도 하기 때문에 나도 한다.'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받아 들인다. 생각해봐라!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결정하고 싶은데로 한 적이 있는지 말이다. 나의 삶을 돌아 볼 때 나는 공부가 하기 싫었지만 친구들이 하고 부모님도 공부를 하라고 해서 공부를 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다른 활동을 하기 보다는 학점을 따기 위해 노력했다. 여름방학에는 영어학원을 가서 나의 방학을 모두 보냈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많은 학생들이 이런 루트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한국 사회라는 태양이 우리를 압박하고 그것에 밀려서 아랍인에게 총을 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총격 사건이 일어나고 뫼르소는 재판을 받으려고 수감이 된다. 감옥에 있을 때 뫼르소의 여자친구는 그녀를 면회 오는데 앞에서 이야기는 안 했지만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위해 요양원에 간다. 요양원과 감옥의 공통점은 바로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다. 그곳의 삶은 기다리는 삶이며 요양원에서는 죽음을, 감옥에서는 판결을 기다린다. 뫼르소는 재판을 받으며 아랍인을 쏜 동기에 따라 재판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뫼르소가 했던 기이한 행적에 근거를 하여 재판을 받는다. 재판과 관계 없는 상황들을 연관지어 뫼르소는 싸이코패스라고 몰아가는 것이다. 뫼르소는 아무 항변도 하지 않고 사형을 선고 받는다. 사형 직전에 신부가 와서 뫼르소에게 회개를 하라고 하지만 뫼르소는 당연히 신부의 말을 씹어 버린다. 그리고 그는 사형장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받아 들인다. 뫼르소는 사회에 대한 저항을 한 것이다. 저항을 할 때 때려 부수는 것만이 저항이 아니다. 사회에 대한 무관심이 뫼르소에게는 사회에 대한 최고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그 저항이 완성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의 책임을 받아들인다. 그가 죽음으로써 그의 저항은 완성이 된 것이다. 


우리는 오바 요조와 뫼르소라는 두 인물을 보았다. 한 명은 가면을 쓰면서 거짓된 사회를 따돌리려고 했지만 그는 실패했다. 오바 요조의 경우는 자신의 과거를 대면하지 못하고 과거의 죄책감과 아버지의 세계에 짓눌리고 일그러져서 죽고만다. 뫼르소는 너무나 솔직하고 쿨하게 세상을 외면해 버린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다만, 그가 멋있었던 것은 그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졌던 것이다. 두 책을 읽고 나면 덜컥 드는 생각은 이들이 사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나는 이런 사회가 가끔은 벅차게 느껴지기 까지 한다. 그렇다고 요조처럼 철저히 가면을 쓰라고 살라고 하는 생각도 없고, 뫼르소처럼 쿨하게 세상을 무시하지도 못한다. 다만, 두 인물들을 통해서 배울 점은 바로 그것이다. '과연 내 자신에게는 내가 진실한가'이다. 우리는 이런 극단적인 두 인물을 따라갈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과연 솔직한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진실된 존재로 살아려고 노력을 해야하고 이 방법이 유일하게 이 세상을 이겨나가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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