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감옥이다.
한국 사회에 살면 많은 사람들이 개인에 대해 관심이 많다. 타인들의 관심이라는 것은 사회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타인의 시선은 사람을 외적인 감옥에 가두는 역할을 해버린다. 오랜만에 본 사람이 살이 찌면 왜이렇게 살을 쪘냐고 사람들이 묻는다. 옷을 트렌디하게 못 입으면 촌스럽다고 훈수를 둔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묻는 것은 어디 대학을 나왔고 어디 동네에 사느냐고 묻는다. 한국인들의 이런 관심은 외적인 것에 몰려있다. 대학을 물어보고 사는 곳을 물어 보는 것은 일종에 사람을 평가를 해버린다. 대학을 물어봄으로 나보다 좋은 대학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사는 동네를 물어봄으로 그 사람이 돈이 많은지 아닌지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런 삶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 집중을 한다. 외적인 것을 꾸미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필요한 요소들 중 하나이지만 타인의 시선에 갇혀 버리면 내면적인 것들은 덜 가꾸게 되고 오직 외적인 것만에 집중을 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타인의 시선은 감옥이고 지옥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한국에서 체면주의와 허례허식이 합쳐져서 강화되는 속성을 보이지만 이런 문제는 사회가 근대화 되면서 예견되어 있던 일들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은 지옥으로 생각했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짧은 우화로 근대의 문제를 비웃어 버렸다.
장 폴 샤라트르는 <닫힌 방>이란 희곡을 쓰면서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자신의 공적을 인정받고자 하는 신문기자 가르생, 동성애자이면서 자신의 남편을 죽인 이네스, 애인과 낳은 아이를 죽인 매춘부 에스텔은 죽어서 한 방에 갇히게 된다. 그 방은 지옥이다. 처음에는 모두가 가식의 가면을 쓰면서 자신들의 체면을 지킨다. 그러나 영원한 지옥의 방 속에서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이 왜 지옥으로 올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털어 놓게 된다. 그러나 이런 진실된 고백 속에서 지옥은 시발점이 된다. 닫힌 방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타인들을 판단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각자 믿음이 깨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세 사람은 지옥 속에서 타인의 시선으로 감시를 받으면서 괴로움을 받게 된다. 샤르트르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타인은 지옥이다'였다. 세 사람이 놓인 형벌은 바로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사물화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샤르트르는 실존주의자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을 하였다. 철학자들이 말을 어렵게 해서 그런데 아주 간단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은 실존을 통해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본질이라는 것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답을 알고 싶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내 행위 하나 하나가 죽기 전까지 쌓여서 나의 본질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글을 쓰는 것을 내가 잘한다면 나의 실존은 글을 쓰는 것이다. 계속 글을 쓰는 것이 인간의 목표를 만들어 완성시키는 것이다.
샤르트르가 <닫힌 방>에서 타인의 시선을 지옥으로 보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 참된 나를 찾는데 방해를 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서 어떤 인도 과학자가 대단한 발견을 하지만 학계에서 그의 발견을 개무시를 당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가 양복을 입지 않고 인도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외적인 것으로 판단을 당한다. 어떤 여경이 범인을 잡으면 그 앞에 붇는 수식어는 이렇다. '미모의 여경이~'라며 외적인 것을 들이 민다. 어떤 연예인이 공부를 잘하면 '얼굴도 예쁜데, 공부도 잘해'라고 하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은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에 관심이 가기보다는 외적인 외모에 집중을 하게 된다. 이런 기사를 보고 남들에게 외모 지적질을 당하면서 사람들은 당연시하면서 자신의 외모와 명품과 허세를 부리게 된다. 샤르트르의 입장에서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는 사람은 자신이 죽을 때 자신의 실존을 잃어 버리는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샤르트르의 말이 일리가 있는 점이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나는 고급 승용차를 10대 샀다' 혹은 '나는 내 얼굴 때문에 SNS에서 좋아요를 몇 개 받았다'라고 고백을 한다면 그 삶은 너무나 슬픈 것이 아닐까? <닫힌 방>에서 그들이 받은 형벌은 영원히 타인의 시선 속에서 갇혀서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들은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면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도 못하게 되면서 자신을 망각해 버린다. 지옥의 본질은 바로 자신을 망각해 버리는 것이다.
일본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코>라는 짧은 단편선에서 코가 비이상적으로 늘어진 스님을 보여준다. 스님은 자신의 코에 대해서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첫번째 이유는 코가 비이상적으로 커서 불편했고 두번째로 그는 타인들의 조롱으로 인한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괴로웠다. 그래서 자신의 코를 줄여 보려고 기이한 짓을 하는데 소설을 읽어보면 재밌다. 그가 코를 나름 줄였지만 사무라이들은 그를 또 비웃는다. 그는 그 웃음에 충격을 받고 자시자신을 잃어 버린다.
큰스님은 읽으려던 경문을 내려놓고, 벗어진 머리를 갸웃하면서 때때로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겅애하는 큰스님은 이럴 때면 반드시, 멍하니 한편에 걸어 둔 보현 보살 화상을 바라보면서 코가 길었던 사오일 전을 떠올리고는 '지금은 더 없이 비펀해져 버린 사림이, 영화롭던 옛날을 그리워하듯이' 풀이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큰 스님에게는 이런 질문에 대답할 만한 지혜가 없었다. <라쇼몬, 민음사 p15)
나는 처음에는 그냥 훅 지나갔지만 류노스케가 큰스님을 주인공으로 했는지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친구 한 명이 절에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스님들은 조용한 곳에서 명상이나 하니까 좋겠다' 그랬더니 친구는 '겉으로는 평안하고 고요해 보이지만 그 스님의 속에서는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을거야'리고 말을 해주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머리에 정구가 번뜩 반짝였다. 스님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서 산꼴로 들어가고 홀로 명상을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며 나란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극복하면서 보살이 되려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마져 타인의 시선은 자신을 망각하게 만들어 버린다. 스님의 모습을 보니 가끔 생각나는 것은 성형이다. 강남미인도라는 만화가 나올정도로 사람들은 성형에 목숨을 건다. 오똑하고 높은 코, 커다란 눈에 쌍커풀이 있고, 이마는 솟아 있고, 보조개가 있는 얼굴... 나는 성형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자신의 본 얼굴을 버리고 인공적인 얼굴을 따라갈 수 밖에 없느냐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텔레비전을 키면 성형을 한 연예인들이 나오고 방송과 SNS에서는 그런 얼굴이 아름다움의 표본이라고 광고를 한다. 회사들도 아름다운 사람들을 원한다. 범죄를 저질러도 대중들은 예쁘면 용서해주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그런데 이런 타인의 시선들은 이제 점점 커져가고 조직화 되어 가기 시작하는 양상을 보인다.
샤르트르나 류노스케가 살았던 시절에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것이 개인과 개인간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타인의 시선은 시스템적로 변모하고 사회적인 형상이 되었다. 이제는 어떤 어플만 받으면 전국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의 얼굴을 평가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즉, 샤르트르나 류노스케가 살았던 시대보다도 지금 SMS가 판을 치는 사회 속에서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더욱 힘들어 졌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던 사람들은 결과가 나오기 전에 평가를 해버리고 나의 뉴스피드에는 성형미인들이 좋아요를 독차지 하면서 나와 우리의 뇌를 세뇌시킨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렇게 해야 좋은 남자다, 옷은 이렇게 입어야 한다, 돈은 이렇게 써야한다 등등 그리고 요즘은 핸드폰 카메라가 발달해서 옷을 이상하게 입었거나 얼굴이 못생기면 사람들이 그것은 인터넷 상에 올리고 스 사람을 조롱해 비린다.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외적인 요소에 집중을 가할 수 밖에 없다. '보이는 것을 가꾸어라 보이지 않는 것은 평가를 못 받으니 시간낭비다'라고 세상이 외치고 있다. 불행한 사회다. 지금 우리는 지옥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