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에는 리스크가 따른다. 그러나 혁신을 행하지 않으면 리스크가 더 크다' -피터 드러커-
대학교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아야 들어가는 과는 바로 경영학과이다. 경영을 공부하면 취업이 잘되기도 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영을 배워야 하는 것은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사실 행정학이나 경영학은 비슷한 학문이다. 경영학은 사기업과 관련된 학문이고 행정학은 정부와 관련된 학문이다. 두 학문의 차이라고 보면 용어의 차이가 있다. 둘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만 경영학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은 그 어감이 강하다. '혁신'이라는 단어나 '변화'라는 단어는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내가 인용한 피터 드러커의 말에 혁신 대신에 변화를 넣어보면 문장의 어감이 달라진다. 혁신이라는 단어는 무엇인가 강력하고 근본부터 바꾸며 공격적인 어감이라면 변화라는 단어에는 그런 느낌이 덜하다. 이처럼 경영학에서는 단어들의 어감을 강하게 하며 똑같은 말을 해도 머리에 콕 들어갈만한 단어들을 사용한다. 나는 이런 것이 의미 부여라고 생각한다. 의미 부여라는 것은 사람에게 특별함을 주고 중요한 것이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김춘수 시인이 말했듯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의미 부여는 당연한 것이다. <어린 왕자>에서도 작가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진정한 관계가 되려면 적절한 의미부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절한 의미부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의미 부여를 과용하고 있는 것이다. <시크릿>이나 <긍정의 힘>이나 하나같이 자기계발서들은 자신의 삶 하나 하나에 의미부여를 하라고 한다. 미국에 조엘 오스틴이라는 목사가 있다. 그는 정확히 이야기하면 기독교를 빙자한 이단이다. 그런데 기독교와 자기계발서가 함께 갈 수 있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이런 함정에 잘 빠지기 때문이다. '내가 기도를 해보니까 나를 의사의 길로 가라는 비전을 들었어'라는 이야기가 가끔 나온다. 나는 이런 것이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끼워 맞춰서 의미부여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기독교 이야기는 그만 끊겠지만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꿈을 연결시키는 것은 과도한 의미부여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쓰는 비전이라는 단어는 성경을 눈에 불을키고 봐도 없다. 비전이라는 단어는 경영학에서 쓰는 단어이다. 이처럼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우리의 삶 하나 하나에 의미 부여를 한다. 그것은 경영학이던 교회던 일종의 시대정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세상에 대해 썩소를 날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밀란 쿤데라였다.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는 짧은 소설이다. 처음 소설을 읽다보면 알랭이라는 등장인물의 여자의 섹슈얼리티를 이야기하며 여성의 허벅지, 엉덩이, 가슴 그리고 배꼽으로 이어지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처음에 책을 접하면 이런 미친놈이 다있냐고 소리칠 수 있다. 그런데 쿤데라는 여성의 신체를 사고하면서 책을 읽을 때 전제를 깔아준다. 여성의 허벅지나 가슴이나 엉덩이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 다르다. 허벅지에는 꿀벅지도 있고 얇은 허벅지도 있고 두꺼운 허벅지도 있다. 가슴도 A컵부터 B컵, C컵 등등 모양도 다양하다. 엉덩이도 킴 카사디안 같은 엉덩이도 있는가 하면 작은 엉덩이도 있다. 이런 다양한 형태 때문에 가슴이나 허벅지나 엉덩이나 그 사람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배꼽은 어떠한가? 배꼽은 모두가 동일하다. 너의 배꼽이나 나의 배꼽이나 배꼽을 보고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찾는다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배꼽은 거의 다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꼽이라는 것은 생명과도 관련된 신체부위이다. 어머니의 탯줄이 나의 배꼽과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쿤데라는 배꼽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담아내고 있는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세상에 그냥 떨어진 존재이다. 배꼽의 후예로 우리는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냥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이다. 쿤데라는 아마도 그의 마지막 저작에서 세상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목적을 타고난 존재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곳에 태어났다는 말에 정면으로 농담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매우 난잡하다. 배꼽의 이야기, 스탈린의 농담, 알랭을 버린 어머니 이야기, 자살하려는 여자를 살리고 익사한 남자의 이야기와 같이 많은 삽화들이 들어가는데 이것을 하나로 관통하는 것은 바로 무의미함이다. 스탈린의 농담에서 스탈린은 이런 대사를 한다.
"쇼펜하우어의 위해한 사상은 말이오, 동지들, 세계는 표상과 의지일 뿐이라는 거요. 이 말은 즉, 우리가 보는 세계 뒤에는 어떠한 실재도 없다, DIng as sich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이 표상을 존재하게 하려면, 그것이 실재가 되게 하려면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 말입니다. 그것을 부과하는 막대한 의지 말이오" (무의미의 축제 민음사 p116)
아마 쿤데라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세상은 모든 것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와 나를 만다는 것은 의지이다. 이런 의지는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보면 이해가 잘 될 것이다. 시지프스는 돌을 산 위로 올리고 그 돌은 떨어지고 다시 돌을 올리고 다시 떨어지는 형벌을 받았다. 시지프스는 자신이 하는 일이 삽질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그의 형벌은 시작이 된다. 만약에 내가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는데 아무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한다면 그 사람은 우울증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그 형벌을 이겨내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바로 이 형별을 받는 것은 나의 의지라고 사고하는 것이다. 내가 벌을 받고 돌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서 대상을 끌어 올리고 나의 의지로 돌을 밀어 올린다는 것을 잃을 때 시지프스는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앞에서 이야기한 샤르트르의 사상과도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다. 나는 세상에 우연히 떨어진 존재이지만 내가 잘하는 일을 계속 해나감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정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한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무의미의 축제 민음사 p147)
쿤데라는 무의미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한다. 이는 데카르트와 파스칼의 생각에 대한 차이로 그것을 알아보겠다. 데카르트는 합리주의자이며 이성을 최고의 덕으로 알았다. 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을 뜯어 보면 이렇다. 생각을 하면 나는 존재하고 생각을 안하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성으로 명명되는 생각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보았다. 그는 이성의 힘을 맹신했으며 이성은 모든 것을 서열화 하였다. 그의 사상은 서양처럼 발달되지 않은 문명을 미개하다고 지칭하기도 하며, 시험에서 점수가 낮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에 비해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여 이성의 능력은 받아들였지만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을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신과 자신을 비교하면 자신이 얼마나 허무하고 바보같은지를 느끼며 좌절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하찮음을 받아들이는 일,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는 일은 더 큰 세상과 우주를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자신이 초라하고 먼지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때 그곳에서 인간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나는 파스칼의 이 생각이 쿤데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미부여를 과도하게 한다. 어디를 가던 나는 꼭 배워야 하고 나는 발전해야 한다고 외친다. 이것은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자세이고 매우 합당한 인간상이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를 위한 발전, 나를 위한 배움만이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의미한 것들에 대해서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나의 배움에 혹은 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과 친구할 이유가 없어지는 사회이다. 당연히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러나 그 의미 부여가 너무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나에게 의미의 최면을 걸면서 외부를 보지 않는다. 쿤데라는 이런 사회와 우리에게 농담 하나를 건내며 자신의 축제... 무의미의 축제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