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라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가 가끔은 궁금해 질 때가 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가끔은 책을 읽는 것이 지루할 때가 있고 나와 같은 시대를 살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무엇이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책을 읽고 책을 읽고 나면 괜히 고민에 빠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그 고민이 내게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홀로 아파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괜히 책을 읽고 글을 써봤자, 적어도 내 친구들은 그냥 '애가 독특하네' 혹은 '문학청년이네'라는 이야기로 일관을 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어쩌면 괜한 것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냐는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어쩌면 고민하기 보다는 내 앞에 있는 것을 따라가고 그 목표를 정복하고 또 목표를 만들고 또 그 목표를 죽을 때까지 계속 만들면서 뛰어간다. 사실 언제나 자신의 외부적인 목표를 만들어서 뛰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멋지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너무 달린다. 미치도록... 나는 이렇게 미치도록 뛰는 것이 삶을 가치있게 만든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종착점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 목표를 향해 그 목표만을 향해서 달려간다. 그것을 목표로 삼으면 그것은 이상이다. 그 목표를 뛰어 가는 당시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 이상이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실패해도 일어서게 되고 괴로움을 당해도 배운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표를 쟁취했을 때이다. 목표를 쟁취했을 때, 목표이자 이상은 현실이 되어 버린다. 즉, 목표는 이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목표가 사라지면 그동안 자신을 끌어 주던 목표는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해 버린다. 나는 이것이 근대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일종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달리지만 내 자신이 없이 달리는 것이 바로 근대의 병이다.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시케는 이미 100년 전에 이 근대의 병을 예견했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의 지폐에 나올 정도로 일본의 문학의 심장이다. 그 중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걸작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의 줄거리에서 간단히 알아보자.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두 주인공이 있는데 관찰자인 '나'와 선생님이다. '나'는 학생으로 우연히 선생님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선생님이라는 작자는 자신의 부인하고만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하고 거의 접촉을 하지 않는 인물이다. 선생은 어린 시절에 부잣집에서 태어났었는데 숙부의 농간으로 재산을 많이 잃었다. 그래도 삶을 영위할 정도의 돈은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나'는 선생에게 관심을 가진다. 호기심 때문인 것 같다. 선생은 과거의 사건 이후 사람을 믿지 아니하고 불신과 허무주의로 세상을 살아간다. '나'는 선생과 교제를 하면서 그를 선생이라고 느낀다. 아마도 차가운 도쿄의 도시 속에서 선생이라는 사람이 나름의 기댈 곳이었던 것 같다. 그러하다 '나'는 아버지가 위중하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아버지의 집으로 간다. 고향에 가서 선생의 전보가 오는데 선생은 이미 자살을 했고 긴 편기가 써져 있다. 그 편지에는 선생이 왜 허무주의적인 삶에 매몰이 되었고 괴로운 과거를 밝히게 된다.
선생이 젊었던 시절 그는 지금의 부인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부인의 어머니는 미망인이었고 하숙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선생은 아무도 못믿지만 자신이 유일하게 믿는 K를 하숙집으로 대려온다. K는 책을 읽어보면 기이한 인물이다. 선생은 K를 신뢰하는 이유는 그가 도를 닦는 사람의 느낌도 있고 뭔가 믿음이 가기 때문이다. 선생은 K를 하숙집으로 부른다. 그리하여 K와 함께 방을 사용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 당시 선생은 지금의 부인이자 하숙집 주인의 딸을 짝사랑한다. 그런데 K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은 선생은 그를 신뢰하다가 하루 아침에 그를 질투하게 된다. K는 진중한 남자였다. 그는 마음을 먹고 선생에게 자신이 하숙집 딸을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즉, K는 선생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그의 신의를 저버리고 하숙집 주인에게 딸과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하고 둘은 약혼을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K는 자살을 해버린다. K의 자살을 보고 선생은 그때 자신의 악함을 마주한다. 그것은 자신이 욕하고 분노하던 자신의 숙부가 배신했던 일을 자신이 K에게 행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 이후 선생의 시간은 멈춰 버려서 '나'를 만나기까지 이 은둔 생황을 했던 것이다.
"나는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을 신용하고 죽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 단 사람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되어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진심으로 진지합니까"
이것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선생이 '나'에게 하는 말이다. 선생은 K를 배신한 자신의 모습에서 그동안 자신은 선한 인물이라고 느꼈던 그것이 깨지고 자신의 악마를 마주하게 된다. 일종에 선생은 K가 죽은 날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 사형선고를 받는다는 것은 일종에 정신적으로 인간을 먼저 죽여버리는 것이다. 샤르트르의 <벽>을 보면 포로로 잡힌 세 사람이 포로로 잡혀 있을 때는 춥다고 운동을 하기도 하고 농담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곧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자 세 사람은 혼이 나가고 자신이 오줌을 지리는지도 모르고 추위도 느끼지 못한다. 사형선고의 형벌의 본질은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기다림 속의 지루함과 공포이다. 우리도 큰 시험을 치룰 때 시험 1분 전까지가 떨리지 정작 시험을 보면 떨림은 없어진다. 이처럼 사형선고는 기다림 속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다. K가 이것을 계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K는 자신이 자살을 하면서 선생을 죄책감이라는 감옥에 가두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선생의 시간은 K가 자살했던 시간에 멈춰 있는 것이다. 선생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세상을 믿지 않고 그 세상에 속한 자신도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나'를 만나고 '나'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더러운 면모를 가진 선생을 따르는 '나'의 순수성을 보면서 마음이 바뀌게 된 것이다.
선생은 '나'가 유일하게 자신을 진심으로 받아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선생은 자신이 죽을 곳을 찾았던 것이다. 그동안 선생의 형벌은 K의 죽음을 홀로 기억하고 자신이 배신자인 가롯 유다라는 것을 언제나 되세김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선생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마음을 먹고 자신의 더러운 면모를 '나'에게 보여준다. 선생은 진실하게 나에게 대한 것이다. 그 진실함을 내보였을 때 선생은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 K에게서 받았던 죽음의 기다림에서 구원받을 시간이었다. 선생은 이미 K가 죽었을 때 같이 죽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속죄를 하기 위해서 살았던 것이다. 이제는 속죄를 했기 때문에 그는 죽음을 택한 것이다. 다시 인간은 신뢰하면서 말이다.
선생의 삶을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멋진 삶을 살기도 했지만 찌질한 삶을 살기도 했고 생각이 짧아서 실수도 하고 큰 일을 저지르기도 하다. 과거를 생각해보면 내 자신이 너무나 작아 보일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 나는 나 자산을 기본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바라 본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힘들다. 그리하여 우리는 외부에 객관적인 목표들을 세우는 것 같다. 내가 합격만 하면 된다!, 내가 취업만 하면 된다!, 내가 회사에서 이런 것을 이루었다! 내가 내 집을 마련했다! 등등... 이런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당연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들여다 보지 않고 외적인 목표만을 따른다. 고민 안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고민을 해야한다. 내가 누구나고! 철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세상 속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인 것이다. 나를 믿을 때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이 많은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